홈 쇼핑에서는 모싯잎 송편을 판매하고 있다. 까만 색깔에 반질반질 윤이 나고 속은 달콤한 하얀 팥고물이 가득 들어있다. 향긋한 모싯잎 냄새가 코로 스며드는 것 같다. 한입 가득 먹음직스런 송편을 보자 입가에 군침이 돈다. 모싯잎 송편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추석 때 영자를 통해서다. 양 갈래로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그 애가 생각난다.
추석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새 옷 한 벌 얻어 입고 마을 어귀에 친구들과 함께 모였다. 각자 손에는 집에서 만든 송편이 몇 개씩 들려져 있었다. 영자는 색동저고리에 무릎까지 내려온 한복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하얗게 화장을 하고 장미꽃처럼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모습이었다. 손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검은색 송편을 들고 있었다. 송편이 왜 이렇게 까맣게 생겼냐고 묻자 모싯잎 송편이란다. 빨갛게 바른 입술이 지워진다고 송편을 먹을 때 마다 입을 “아” 하고 크게 벌리고 먹었다.
영자는 까만 피부에 원피스를 즐겨 입은 소녀였다. 밝고 명랑한 모습에서 그늘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자 남자 패를 갈라서 싸울 때도 사내애들 앞에서 “이문뎅이 같은 새끼들아” 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돌멩이를 던지던 아이였다. 언제나 당당하며 그늘지지 않은 영자의 가정생활을 안 것은 그 애가 아버지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일상의 모습을 보면서 부터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자 젊은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갔다. 치열한 전투 중에 생사를 하늘의 뜻에 맡겼다.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의 상흔은 생각보다 깊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사상자들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 중에는 팔 다리를 잃고, 또는 눈을 잃고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영자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폭격 맞은 전투 현장에서 사경을 헤매다 두 눈을 잃고 야전병원에 입원 했다가 겨우 목숨 부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지만 그는 야전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와 결혼해서 남매를 낳고 살았다.
도로변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오막살이집에서 눈먼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 곁에는 영자가 항상 함께 있었다. 언젠가 술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자 “아부지, 빨리 집으로 가자” 하면서 뒤에서 밀고 가던 어린 소녀는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몸무게를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쳐 보였다.
농번기에는 부지깽이도 일손을 돕는다는 바쁜 시기에도 영자아버지는 날마다 낚시 바구니를 메고 저수지로 향했다. 영자는 초등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서 손과 발이 되었다. 이른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수지를 향한 부녀의 발걸음은 이슬을 머금고 스러진 풀잎을 젖히고 저수지가에 자리를 잡는다. 넘치는 햇살에 윤슬 가득한 아침 풍경은 반짝이는 푸른 물결 위에 하루의 꿈을 펼친다. 그가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낚시는 마음의 평화와 보이지않는 희망을 낚는 수단이었다. 그의 대나무 바구니에는 낚시 바늘에 걸려 나온 붕어가 햇볕에 은비늘이 유난히 반짝거리며 푸덕이는 붕어를 한참 바라봤다. 땡볕에 앉아서 낚싯대만 바라보는 영자는 한창 뛰어노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 놀지도 못하고 아버지 낚싯대만 바라보는 자신이 싫증을 느낄 때 마다 돌멩이를 물 위로 비스듬히 던져 물수제비를 떴다. 돌이 물 위에 몇 번 부딪치나 세어보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내려진 낚싯대를 들어 올릴 때 마다 팔딱거리는 붕어가 몇 마리나 되나하고 바구니 속에 손가락으로 뒤적거리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아래 앉아서 낚시 바늘 끝의 걸림의 느낌은 비장애인 보다는 미세한 느낌의 감각이 뛰어났다. 휘청거리는 낚싯대를 들어 올리려 하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면서 영자의 “스~으윽” 소리와 함께 장단 맞춰 낚싯대가 올려진다. 낚시 바늘에 낚인 붕어나 아버지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영자의 신세나 자유를 박탈당하긴 매한가지 같았다. 은비늘 같은 수많은 날들이 어린영자의 희망의 끈이 되지는 못했다. 어느 날 부터인지 낚시 바구니를 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낚시하러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1급 상이용사인 남편과 함께 사는 영자어머니를 두고 마을사람들은 ‘간호원’ 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는 그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풍성했다. 주변 이웃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한 점도 있지만 도벽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웃 사는 사람들은 집에 있는 물건이 자주 없어진다며 그녀의 소행이라고 의심을 했다. 집에서 물건을 도난당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그녀의 집에 가서 도난당한 물건 내놓으라고 따지면 그녀는 증거를 대라며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나왔다. 벼르고 갔던 이웃들도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 후로 영자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 앞으로 나온 피같은 보상금을 받아서 집을 나갔다는 소문이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남편과 어린자식들 버리고 눈 못 보는 남편재산을 가지고 도망간 나쁜 여자라고 원성이 높았다.
겨우 열 살 된 아이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오빠는 공부하지 않고 허랑방탕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는 오직 낚싯대만 메고 세상을 유영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낚시터를 따라다니는 일이 이골이 나자 영자 역시 어느 날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린 나이에도 자기의 인생이 언제까지 아버지의 그림자로 묶여 희생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출을 결심한 것이다. 낚시 바늘에 걸려온 붕어가 바구니를 뛰어넘어 저수지로 돌아가듯 그녀는 아버지에게 저당 잡힌 인생의 끈을 과감히 끊어버렸다. 감옥 같은 집에서 뛰쳐나가 자유를 찾아 나섰다. 목포로 어머니를 찾아갔다는 말도 있고 보따리 하나 들고 서울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들은 가출과 귀가를 반복했다. 홀로 남겨진 영자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이사를 했다. 주변사람들의 말로는 아내와 딸이 있는 목포로 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반세기가 훌쩍넘은 지금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딸의 손에 의지했던 아버지는 그후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일은 퇴근길에 모시송편을 한 팩 사들고 와야겠다. 먼 기억속의 소녀가 건네주던 그 송편은 나의 유년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