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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의 노래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by 샤론의 꽃


쌀에 보리쌀을 섞은 잡곡밥에 된장찌개로 저녁상을 올렸다. 모처럼 별미로 내놓은 밥상 앞에 남편은 인상을 찌푸리며 식은 밥이라도 흰쌀밥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마지못해 물 말아서 후루룩 먹고 나서는 앞으로 보리밥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육,칠십 년대의 빈궁한 시절 보릿고개를 겪었다면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시사철 꽁보리밥에 된장국만 먹던 시절에는 지겨운 보리밥은 보기만 해도 질렸다. 그나마 보리밥이라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집은 축복받은 집에 속했다. 먹고 살기 급급했던 육,칠십년대 의 어린 내 기억은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면 굶주림은 면했다며 밭에서 보리를 미리 베어다가 식량으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향수를 기억하고 모처럼 별식으로 지은 보리밥이 천덕꾸러기가 돼버리고 식은 밥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질리도록 먹었던 보리밥에 대한 추억이 가난했던 과거의 고통으로 각인 됐던 것 같다.


초여름의 태양이 머리위에서 따가운 열을 발사하는 어느 날, 집에서 보리밭 한 귀퉁이 미처 베지 못한 보리를 베라는 어머니의 명령이 숙제처럼 떨어졌다. 점심때가 가까이 되어서 어슬렁거리며 밭에 나가봤더니 옆 밭에서는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온가족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열심히 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봤더니 조그마한 꼬마 애들까지도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많지도 않은 보리밭 면적을 두고 일은 하지 않고 밭둑에 앉아서 놀다보니 어린애들도 열심히 움직이는데 책임감 없이 빈둥거리는 내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낫을 들고 한참 보리를 베고 나자 어디서 바람결에 라디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들판에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다. 바로 옆 집 에 사는 경한이 아버지였다. 그는 할일 없이 커다란 라디오를 항상 들고 다녔다. 심지어 비오는 날에도 라디오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며 들었다. 그 당시 라디오 있는 집은 부유층에 속했지만 그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집 나간 아내가 남긴 어린 아들과 노모와 살면서 날마다 하루하루를 빈둥거리며 지냈다. 결혼한 여동생들이 경제적 여유 있게 살기에 노모를 위해서 생활에 보태라고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도움을 준 것 같았다. 날마다 들고 다니는 라디오도 여동생이 최신형으로 사준 고급 라디오고 재산목록1호였다.


경한이 아버지가 있는 곳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오막살이집과 밭 뙤기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다. 우리 밭 바로 아래 있는 보리밭은 보리 베기 시일이 지나서 비라도 내리면 폭삭 썩을 수밖에 없었다. 어슬렁거리며 한손에 라디오를 들고 있던 그는 보리 벨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행동이 한심하다고 느낌이 들었다. 보리는 왜 안 베냐고 물었더니 보리 베어봐야 맛없는 보리밥밖에 더 먹겠냐며 밭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눈에 거슬렀다.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는 바쁜 때에 남들은 다 논밭으로 일하러 갔는데 일이 없어도 놀기가 민망할 정도로 바쁜 농촌 현실과 그는 거리가 멀었다. 아예 남들이 보는 따가운 시선도 그와는 상관없어 보였다.


한참 열나게 보리를 베고 나자 등에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많은 면적도 아니고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맡았으니 빨리 베고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 하고 일에 박차를 가했다. 라디오를 밭둑에 내려놓은 그가 보리타작 하는 옆 밭으로 가더니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말했다. 담배도 안 피운 사람이 라이터를 빌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 했지만 어디 쓸데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내 할일에 열중했다. 조금 지나서 매캐한 연기와 후두둑 후두둑 보릿대 타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한이네 밭에 불길이 일었다. 이미 보리밭에 불길이 번져서 보리알 튀는 소리가 톡톡 거렸다.

“아저씨 보리밭에 불났어요. 빨리 오세요.”

“응 내가 불 질렀다.”

“불은 왜 질러요?”

“덥고 일하기 싫어서 그냥 불 질러 버렸다.”

일하기 싫으면 농사 안 지은 사람한테 베어다 먹으라고 하지 불은 왜 질렀냐고 묻자 남 주기는 아깝고 일하기는 싫고 해서 불질러버렸단다. 그는 약간 모자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살던 부인도 그런 이유로 헤어진 것 같았다. 내가 굳이 일 하지 않아도 동생들이 도와주는데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모양이다. 노모와 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자기가 노모를 모시고 산다고 생각 한 것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노모의 보호를 받는 입장 이라는 걸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누군가 불타는 보리밭 옆을 지나가면서 혀를 끌끌 차며 “저런 한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홀아비 신세 못 면하지”


그의 하루 일과는 라디오 들고 나와서 수확 할 수 있는 멀쩡한 보리밭에 불 지르고 간 것이 하루 일의 전부였다. 비가 내린 뒤에 불 지른 보리밭에는 노랗게 볶은 보리알이 밭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가족을 책임져야한다면 그런 행동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사는 베짱이의 노랫소리에 불과한 그의 하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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