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한 뭔가를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급변의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지긋한 연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제의 배움을 다하지 못했는데, 오늘의 배움이 내 앞에 떡하니 놓여있는 기분이랄까. 그 배움이 생계와 직결된 것이라면 자신을 등 떠밀어서라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청춘에겐 설레는 배움이 되겠지만 노년의 배움은 반복되는 버퍼링에 의기소침해지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영민하고 민첩하던 모습은 이미 과거에 박혔다. 시대가 천천히 변하던 그때, 사람들은 변화를 수용할 시간과 함께 했을 것이다. 그 변화를 즐길 여유와 함께 생활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싶다도 하다.
그러나 급변의 시대에 배움을 멈춘다는 것은 곧 소통의 부재이자 세상과의 단절이다. 배움이 자신 안에서 더는 일어나지 않을 때의 소외감을 감수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고 보면 해박한 지식에도 끝없는 배움을 갈망했던 아인슈타인의 삶이 새삼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익히 아는 지식의 부분을 원이라고 한다면, 원 밖은 아직 내가 모르는 부분이다. 지식의 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원의 둘레도 함께 늘어난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모르는 것에 대한 갈증이 더불어서 오기 때문에 배움에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배움을 왜 멈추지 않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론 물리학자였던 그에게 자신의 의문을 풀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학문적인 배움을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배움의 폭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생을 해온 일이고 일부는 관성의 작용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뤄지기도 한다.
평범한 인생에 있는 이들에게, 중장년의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아인슈타인과 같은 학구적 배움의 행동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하나를 알면 그 하나에 따라오는 내 무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안다. 자신의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이들이라면 다른 분야 전문인들과의 소통에 유연하다는 것을.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남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도량과 아량을 함께 익힌 때문이다.
물리학자라면 물리학으로, 수학자라면 수학으로, 건축 공학가라면 건축으로, 화가라면 그림으로, 음악가라면 음악으로 저마다의 언어로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질지라도 그들은 각자 자신이 사용해온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학문의 진리와 삶의 진리, 그리고 우주의 섭리는 서로 맞닿아있다. 많은 분야의 다채로운 전문 지식과 연구가 쓰일 곳은 결국 자연인 인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사람과 인생과 자연을 닮았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의 언어가 서로 다른 표현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가능한 것 또한 이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 하나를 알면 모르는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배움의 세계라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배움은 그래서 치열하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무덤에 눕는 그 순간까지 배움은 어떤 형태로든 내 주위를 맴돌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고 행동하기를 권한다. 나 자신만의 생각이나 편협한 배움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편협한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밖으로 삐져나올 때가 있다. 뜨끔한 생각이 절로 든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직 내 안에 살고 있음에야. 이러다 정말 편협한 할머니가 되면 어쩌지? 벌써부터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일은 중요하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겠지만 배움은 죽음으로도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마다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방(紙榜)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쓰면서 말이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로, 리더로 존경받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거나 그 안에 갇혀 아집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그들을 꼰대라고 칭하는 이들도 없다.
어정쩡한 배움으로 장시간을 살아온 이들일수록 어설프게 완성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실없이 늘어난 나이 때문이기도 할 테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배움적 사고는 더욱 견고해진다. 소통의 부재도 찾아든다.
어떤 배움을 해왔건 그 배움을 내려놓는 일에 거부감이나 게으름은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신의 넓은 도량과 타인에 대한 아량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마음먹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무지의 지를 깨닫는 일이 순서다. 그래야 겸손과 수용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른이 되면 도량과 아량이 절로 생긴다고 착각했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다. 사람을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나이를 먹는다고 바람직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알았을 때는 몹시도 씁쓸했다.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학문적인 배움을 갈고닦지 않았더라도 인생의 배움을 터득한 이들을 통해 그들의 도량이 존경받는 전문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편협하지 않으며, 아집에 빠져 독설을 내뱉지도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용하는 겸손함이 그들에게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세상은 급변하고 진리도 변화하며 정보는 수시로 바뀐다. 고령의 뇌는 인지활동이 더디고 따라가자 하면 고3의 학습생활을 동반할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 되지 않을까.
시대가 변화한다는 것. 그것도 아주 빠르게. 배움의 질서가 무너지고 역행하게 되는 때와 마주하는 순간이 오기도 할 것이다. 더딘 인지력에도 맞서고자 한다면 자신의 도량과 아량을 먼저 갖출 일이다.
나 자신이 바늘 끝도 안 들어가는 편협한 할머니가 된다면 내게 그보다 최악은 없을 듯하다. "세 살 먹은 아이의 말도 귀담아들으랬다"는 속담처럼 경험이 주는 편협됨과 나이에서 오는 아집에서 나는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내 배움의 질서가 무너지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변화는 배움의 결과로 이뤄진다. 배움은 유동적인 질서체계를 갖는다. 변화하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될 수 없다. 고착화된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려는 내 마음을 그래서 경계한다. 사람마다 배움의 방식은 다르지만 깨달음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는 저마다의 선택이다. 하지만 자신의 도량과 아량을 갈고닦는 일은 인생 전반전을 넘긴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배움이지 않을까. 변화의 배움에 올라탈 것인가, 자발적 소외를 견딜 것인가는 결국 본인 선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