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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련 Jan 24. 2022

고독

혼자를 견디는 힘

사회적 격리와 거리두기로 인해 인류가 하나의 연대라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살면서 한 번쯤 아니 빈번하게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는 생각을 한다. 개인은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으로 존재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해주는 상대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혼자의 삶과 일상에 익숙한 나는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편이지만 내 주변에는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도 시큰둥해지고 더는 내 편이 아닌 것만 같다. 성인이 된 자녀는 자신들의 인생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어쩌다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를 할라치면 까칠하다. 데면데면 굴기 일쑤다.


분주하고 치열했던 삶의 날들이 하루아침에 과거에 묻힌다. 개개인은 뜻하지 않은 개개인의 그 어떤 사유로 어느 순간 막막한 시간에 놓이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은퇴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누군가와의 이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갑자기 길을 잃은 아이처럼 뇌가 하얗게 변해버리고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껏 잘 살아왔음에도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빈껍데기만 남아있는 기분. 무력감과 허탈감이 정신없이 밀려오기도 한다.


빈 둥지 증후군을 앓거나 길어진 인생에 너무 일찍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혼자를 견뎌야 하는 시간 앞에 수시로 서게 된다.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우리 모두가 심심치 않게 경험하는 일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작년 연말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인이 고독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감염을 막기 위해 각국이 입국 금지령을 내리고 봉쇄조치가 행해진 곳도 상당하다.


교류나 이동이 통제되고 제한하는 상황에서 답답증을 느낀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개인은 고립과 고독의 순간을 절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홀로 극복해야 하는 시간들 앞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자가 격리를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폐부를 파고드는 불안의 시간을 고독감으로 달래지 않았을까.


코로나19의 창궐이 있기 전에도 나는 줄곧 혼자의 심심한 생활이었다. 적어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그랬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드물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발길도 드물게 하니 말이다. 자의로 이뤄지는 일인 만큼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다.


고독함은 있어도 외로움은 없는 날들의 연속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코로나19의 사태로 인한 심적인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잠깐의 외출에 무심코 집 밖을 나갔다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동네 사람들을 보고서야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스크를 깜빡하고 그냥 나왔으니 집에 다시 가 챙겨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임에도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싶다.


평소에 많은 교류가 있던 이들이라면 지금의 사태에 누구보다 더욱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실 그 결이 다르다.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상대에 대한 갈증이 외로움이라면 고독은 철저하게 혼자여야 빛을 발하는 그 무엇이다.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 안에 고독이 존재한다고 나는 여긴다. 겉으론 평온하고 무료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하고 분주한 고독의 시간인 것이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오십. 미국의 권투 선수 알리는 "오십 대가 되어서도 이십 대 때에 가졌던 것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인생 삼십 년을 낭비해 온 셈"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인생 오십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십 전의 인생이 나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이었다면 그 이후는 세속적인 욕망의 끈을 느슨하게 하거나 욕심을 비워야 하는 삶이다.


은행의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일선에서 물러난 나의 지인은 퇴직과 더불어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일 중독자처럼 일했고 매일 사람을 만나는 일로 몇십 년을 살았다. 오십 중반에 본의 아닌 퇴직을 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마냥 놀기에는 어정쩡한 나이고 뭔가 새로운 것을 빨리 시작해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그가 고향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해외에 사는 형제자매들을 방문하는 것을 소일하며 지내던 무렵이었다. 퇴직 후 불과 몇 개월이 흘렀을 뿐인데 그에겐 참으로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일이 년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며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입사해 정년퇴직까지 한 직장만을 다녔으니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일이 그에겐 어려운 일일 수밖에.  


나는 혼자서 보내는 내 시간들에 대해 가볍게 나열했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거나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거나 동네를 산책하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어떤 때는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가끔은 취미 모임에 나가기도 하고 과거에 관심 뒀던 것을 호기심에 배워보기도 한다고.


시시때때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불안에 단련된 이들은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거나 관계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라면 앞으로 펼쳐질 끝을 알 수 없는 혼자의 시간이 처지 곤란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에 빠져들기는 쉬워도 분주한 고독의 시간에 드는 일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혼자의 일상을 살아간다지만 알게 모르게 맺어진 관계들이 내 주변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작가라는 직업적인 특성과 혼자 있기를 즐기는 경향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유독 많은 편이다. 가끔은 어떻게 그렇게 홀로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혼자여도 아니 혼자여서 생산이 가능한 일을 하면 된다. 이때의 고독은 필수적이고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움을 낳는다. 치열한 생각에 심심할 짬이 없고 어쩌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거나 문 안에 들어설 수도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말이다. 외롭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우리가 고독과 만나야 할 시간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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