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갱도요새 Sep 23. 2021

감자채볶음은 언제 나오나

베이컨만 골라 먹어도 좋아

감자채볶음은 맛있는데 몸에는 좀 안 좋은 음식과 맛은 그저 그런데 건강한 음식 사이의 그 애매한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감자채볶음에 필연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어묵이나 햄, 스팸, 베이컨 등의 육가공식품이 건강에 썩 좋지는 않아서 그렇다. 가정에서 베이컨감자채볶음이나 햄감자채볶음을 해주면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햄과 베이컨만 골라먹는 집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감자만 볶거나 양파, 당근, 파프리카만 채썰어 같이 볶으면 편식쟁이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안 먹는다. 물론 볶아낸 감자도 정말 맛있지만 베이컨이나 햄에 비할바는 아니다.


밥도둑으로서 감자채볶음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무엇보다 식어도 맛있다는 점에 있다. 밥상 말고 도시락 반찬으로도 많이 활약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감자채볶음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와도 맛있다. 따뜻할 때 먹는 것이 최고로 맛있긴 하지만 차가우면 차가운대로 그 서걱거리는 식감이 좋다.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감자채볶음을 따뜻한 밥에 비벼먹는 것도 맛있다. 물론 차가워진 감자채볶음을 밥에 비벼먹는 것은 대개 자식들이 따뜻한 음식만 먹길 바라는 엄마들이다.



우리 집에서 누구보다 감자채볶음에 진심이었던 사람은 막내동생이다('막냇동생'이 맞는 표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막내동생의 느낌이 안 살아서 결국 막내동생으로 표기했다.).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동생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밥을 안 먹었다. 반찬으로는 참치랑 김, 햄만 먹었고 거의 먹는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온 가족이 밥그릇을 들고 동생을 따라다니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밥 먹이기는 별다른 재능이나 기술을 요하지 않았기에 주로 내가 밥 먹이기 담당이었다. 그때부터 변호사가 될 떡잎이었는지 온갖 말로 동생을 현혹시켜 한 숟가락씩 더 먹였다. 동생은 늘 밥을 물에 말아먹었는데 그 위에 반찬을 올리고 위에 김으로 덮어 무슨 반찬이 올라가 있는지 모르게 해서 온갖 반찬을 먹였다. 물에 말은 밥에는 김이 접착제로 붙인 것마냥 철썩 달라붙는다.


그런 막내동생이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반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감자채볶음이었다. 감자채볶음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독 감자채볶음이 있으면 밥을 잘 먹었다. 햄버거와 피자와 각종 편의점 음식을 탐닉하던 막내동생이 그나마 건강식으로 먹는 반찬이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감자보다는 베이컨 위주로 골라먹었지만. 지금도 감자채볶음을 잘 먹는 편이다. 아무튼 밥을 안 먹어서 모두를 걱정 시켰던 막내동생은 감자채볶음 덕에 쑥쑥 커서 지금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고 지금 꽤 늦은 나이(?)에 공군으로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감자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은 학교와 군대일 텐데 지금은 코로나로 학교에서 감자 소비가 줄어서 아마 군인들이 가장 많은 양의 감자를 소비하고 있을 것이다. 강원도 내의 부대라면 더욱 그렇다. 군인 시절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종종 감자가 안익은 채로 나오는 군대의 감자채볶음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건 전혀 밥도둑이 아니고 그저 고역이었을 뿐이다. 덜 익은 감자는 푸석거리는 사과 같은 식감이 나는데, 덜 익은 걸 먹어도 크게 탈은 안 나지만 간혹 설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 군대를 가본 적은 없지만 여유있게 설사할 시간 같은 걸 주지는 않을 것 같다.


코로나 시국에 군대에 입대한 막내동생은 지금 입대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휴가를 딱 두 번 나올 수 있었고, 그마저도 한 번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온 거였다. 본인 말로는 버틸만 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머리숱 많던 애가 정수리에 탈모가 올 정도니 말로는 안 해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대충 감이 온다. 많이 허얘진 정수리를 보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딱히 뭘 도와줄 수도 없어서 그냥 비타민B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 놀랍게도 감자에는 비타민B, C, 이산화규소가 많아서 탈모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한 장면


막내동생은 공군 헌병이다. 최근 'DP'라는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헌병에 대한 관심도 나름 높아진 것 같다(다만 2021. 8. 31.자로 군사법원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이제 DP라는 보직은 사라질 예정이다.). 주변에서 다들 추천을 하길래 나도 1화를 봤는데, 폭력성을 견디지 못해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군대는 온갖 부조리와 비상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군형사사건 돌아가는 걸 보기만 해도 여전히 군대 내의 부조리와 가혹행위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수시로 소리를 질렀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때렸고, 욕설을 하고, 모욕하고 멸시했다. 오히려 'XX병장님'이라며 '님'자까지 붙여가며 가해자를 존중하고, 맞는 동안 '이병XXX'이라고 자기 이름을 외치며 자신이 오직 계급이 낮아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수차례씩 각인시킨다. 더 높은 계급의 누군가가 들어오면 그 전까지 가해자였던 자는 금방 피해자가 된다. 더 낮은 계급의 누군가가 들어오면 그 전까지 피해자였던 자는 금방 가해자가 된다.


제일 놀라웠던 것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다. 나는 군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굳이 찾아보는 남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 많이들 이 드라마를 좋아했다. PTSD가 온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서(하지만 진짜 PTSD를 앓고 있는 사람을 만나봤다면 그런 말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들 '나도 다 겪은 일이다'라며 드라마 속 가혹행위에 공감하고 있었다. 다들 '라떼는 말이야'라며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이 있었음을 너도 나도 무용담처럼 털어놓았다. 천하제일불행대회라도 펼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냥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은 폭력은 없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보다 약자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폭력을 가하고, 그것이 당위로 받아들여지던 세상을 약 2년간 겪는 것은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로 남는다. 유독 한국사회에 약자를 혐오하고 멸시하는 풍조가 강한 것은 군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이 당한 폭력을 기억하며 '나는 약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들 그런 끔찍한 기억을 갖지 않으면 좋겠다. 누구도 그런 트라우마를 겪지 않으면 좋겠다. 내 동생의 머리카락이 더 이상 빠지지 않으면 좋겠다. 그냥 다들 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반찬투정도 좀 하면서, 감자채볶음의 베이컨만 골라먹으면서 그렇게 지내면 좋겠다.




재판장님, 이 사건 피고인인 감자채볶음은 과거에 수시로 밥을 절취한 상습절도의 전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군부대 내에서의 밥 절취 사건에서는 피고인은 설익어서 전혀 밥을 절취할 수 없었고, 자칫 다른 사람에게 범행을 전가하려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어 조심스러우나 피고인보다는 돼지고기감자조림이 주로 밥을 절취하였다는 진술이 담긴 탄원도 많았습니다. 동종 전과가 있는 피고인이 의심되는 것은 사실이나 피고인의 범행이 합리적 의심을 넘어 증명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부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찌짐은 부침개보다 맛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