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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Aug 16. 2021

찌짐은 부침개보다 맛있다

부침개? 전? 지짐이? 찌짐?

부침개는 진짜 맛있다. 흔히 튀긴 음식이 다 맛있다고 하지만 부침개도 만만치 않다. 김치 튀김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김치부침개는 대존맛인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튀김은 가정집에서 하고 나면 그 뒷감당을 할 생각에 요리 시작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지만 부침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물론 부침가루가 좀 날려있을 수도 있지만 튀기고 남은 기름에 비하면 부침가루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부침개는 전이라고도 부르고 지짐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완전히 똑같은 음식은 아니다. 부침개는 꾸덕하게 반죽물(?)을 만들어서 거기에 각종 재료를 넣은 것이고, 전은 동태전이나 육전처럼 전의 이름을 구성하는 메인 재료에 밀가루나 부침가루 등으로 뭔가 겉 껍데기(?)를 입혀 만드는 것이다. 개떡같이 설명했지만 K-식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김치부침개와 김치전은 완전히 똑같은 음식이고, 해물파전은 또 부침개 형식으로 만드는데 전이라고 부르니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침개든 전이든 지짐이든 일단 부쳐놓기만 하면 밥 한 공기는 뚝딱이다. 밥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한테 밥을 전으로 납작하게 부쳐서 밥피자라고 뻥을 치면 신나서 먹고, 남은 캔참치를 처리하기 힘들 때 집에 남은 야채와 같이 참치전으로 만들어버리면 순식간에 다 먹어치울 수 있다. 비 오는 날 스뎅볼에 김치를 왕창 때려 넣고 칼과 도마도 꺼내지 않은 채(설거지거리만 늘리는 일이다.) 가위로 슥삭슥삭 잘라서 김치부침개 만들어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꿉꿉함마저 가시는 기분이다. 집에 항상 부침가루를 구비해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짐이라는 말은 표준어인데도 막상 잘 쓰지 않는다. 가끔 전집 상호에 'XX지짐이'라는 식으로 쓰이는 정도다. 대신 경상도에서 '찌짐'이라는 사투리로 변형되어 맹활약하고 있다. 막 대학에 가서 드디어 동네 친구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을 무렵, 대구에서 온 친구가 정구지찌짐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게 뭐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왜 정구지찌짐을 모르냐고 했다. 놀랍게도 그건 부추전이었다. 우리 엄마도 경상남도 진주 출신이라 경상도 사투리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정구지찌짐은 아주 새로운 단어였다. 놀랍게도 경상도 안에서도 진주는 정구지가 아니라 '소풀'이라고 부른다.


엄마의 고향인 진주가 속한 경상도에는 신기한 찌짐 문화가 많다. 엄마에게 늘 카톡으로 어른들 특유의 덕담 글귀와 좋은 링크(?)를 보내주는 외숙모는 엄마 핸드폰에 '대구언니'로 저장되어 있는데, 대구언니도 그렇게 드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구와 부산에서는 부침개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부산에 유명한 동래파전집 같은 곳에 가면 초장을 같이 주는 이유다. 간장 베이스인 타 지역 사람들에겐 아주 희한하게 느껴져서 도대체 초장을 왜 주나 싶겠지만, 거기선 원래 초장이랑 먹는 음식이다.


경상도의 늙은호박전도 타 지역 사람들에겐 생소하다. 타 지역 사람들에게 호박전이라 함은 마땅한 밥반찬 없을 때 애호박 하나 사다가 동그란 형태 그대로 서걱서걱 썰어서 계란물 입혀 구워내거나, 채 썰어서 다른 재료도 넣어 크게 부쳐내는 것이다. 하지만 경상도의 늙은호박전은 재료부터 애호박이 아니라 늙은호박을 쓰고, 이걸 채 썰어서 샛노란 호박전으로 부쳐낸다. 애호박전보다 달고 맛있다고 하는데 사실 먹어보진 못했다. 늙은 호박은 그림책에서 보는 주황색의 호박인데, 타 지역 사람들에겐 요리보다 오히려 핼러윈의 잭 오 랜턴으로 더 익숙할 거다.


경상도의 특이한 찌짐 재료 중 하나는 바로 방아잎이다. 독특한 향이 나는 깻잎 비슷하게 생긴 잎인데, 남부지역에선 엄청 많이 쓰이는 것에 비해 서울에선 잘 쓰지 않는 재료다. 내 동생들을 포함해서 이 향을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다. 경상도에선 방아잎을 매운탕이나 추어탕 같은 탕류에도 꼭 넣고, 부침개에도 꼭 넣는다. 방아잎이 뭔지 몰랐을 때 진주 놀러 갈 때 이모가 해주는 부침개는 진짜 최고로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독특한 향을 내는 재료가 바로 방아잎이었다. 물론 나한테 방아잎을 준다고 해서 이모처럼 요리할 자신은 없다.


경상도의 늙은호박전. 타 지역 사람들에겐 아주 생소한 음식이다. 진주사람인 엄마도 안 먹어봤다고 하니 진주음식은 아닌 것 같다.


신기한 찌짐이 많은 경상도 진주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모르긴 몰라도 엄청 예쁨 받으면서 자랐을 것 같다. 엄마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엄마는 서울로 발령을 받아 진주에서 서울로 왔다. 지금은 완전히 서울 사람처럼 말하지만 아직도 '의사', '의자' 같은 발음을 잘 못하는 의외의 면모도 있다. 이모한테 전화가 오면 완전히 진주사람으로 돌아가 '언/!니'라고 진주 억양으로 엄청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어린 시절 진주 할머니 집에 놀러 가는 건 되게 큰 연례행사였다. 그 시절에 진주까지 가는 길은 진짜 멀었고 맨날 땡깡부리는 어린 시절 그 먼 길 중간에 휴게소 들러서 우동 사 먹는 것만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할머니 집엔 집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고 밤에는 집 안에 요강을 놔뒀는데 그게 너무 싫어서 유독 할머니 집 가길 싫어했다. 푸세식 화장실이 무서워서 동생한테 같이 가달라고 한 적도 많고, 요강에 볼일을 보는 것도 뭔가 찝찝했다.


그래도 진주에 가면 늘 맛있는 음식이 많았다. 할머니는 밥상 덮개 아래에다가 항상 뭔가를 잔뜩 올려두셨고,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거기서 하나씩 밑반찬을 빼먹었다. 이모집에 가면 맛있는 건 더 많았다. 이모는 진짜 말도 안 되게 요리를 잘했다. 나는 콩국수를 안 좋아하는데 이모가 해 준 콩국수는 두 그릇을 먹었고, 동생은 장어를 안 좋아하는데 이모네 집에선 장어를 잔뜩 먹었다. 방아잎과 땡초를 넣은 부침개도 이모가 세상에서 제일 잘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진주는 항상 풍요로웠다. 뭐든지 항상 맛있는 게 있었고, 되게 맛있는 멜론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6남매의 가족들까지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사람도 항상 많고 정겨웠다. 새벽까지 안방에서 이어지는 술판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아서 9시면 잠자리에 들던 새나라의 어린이는 잠에 들만하면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나서 잠을 설쳤다. 그렇게 풍요로운 진주를 뒤로 하고 엄마는 20대 시절에 혼자 서울로 왔다.



엄마는 늘 모든 것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엄마한테도 분명 타지 생활은 힘들었을 거다. 방아잎도 없는 서울에서 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의 진주사람에게 삶이 녹록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교통이 편리한 시기도 아니라 가족들이랑 연락도 하기 힘들고 고향 내려갔다 오는 것도 큰맘 먹고 다녀와야 하는 때였으니 더욱 그랬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진주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어머이!'라고 크게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항상 들떠있었다.


몇 달 전에 엄마 아빠가 젊었을 때 모아둔 레코드판을 싹 꺼내와서 정리하고 있길래, 옆에서 정리는 안 도와주고 구경만 했다. 생각보다 엄마의 취향은 넓었고 클래식이나 팝송도 많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 '사운드 오브 뮤직'의 레코드판도 있어서 신기했다. 어떤 레코드판에는 20대 시절의 엄마가 붙여놓은 메모들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뭔가 다짐하는 듯한 말들이 적혀있는 그 레코드판을 보니 뱅글뱅글 도는 턴테이블에 조용히 판을 올려놓았을 그 시절의 엄마가 상상된다. 가까운 곳에 가족 하나 없이 타지 생활로 힘들었던 엄마에게 가장 위로가 되어주었던 것은 음악이었던 모양이다.


음악으로 위로받으며 타지생활을 견뎌낸 엄마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원을 올 A+로 마치고 자식 셋을 키워낸 초인이 되고야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되는 스펙인데 아무튼 그걸 해냈다. 아마 진주의 풍요로운 에너지 덕분인 것 같다. 자식들을 성인으로 다 키운 엄마는 풍요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베란다에 식물을 키우다가 거의 밀림 수준으로 만들었는데, 어느 날부터 방아잎을 집에서 키우기 시작하더니 방아잎 넣은 부침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방아잎 들어간 찌짐을 먹으면 풍요로운 진주 냄새가 난다. 엄마는 그렇게 고향을 그리고 있나 보다.





재판장님, 피고인 부침개는 범행을 모의한 사실이 없으며 범행 현장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실행행위에 가담한 것은 공동피고인인 전과 찌짐이며, 목격자들의 진술도 전인지 부침개인지 찌짐인지 분명치 않아 피고인과 공동피고인들 중 누가 절도행위를 한 것인지도 명백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피고인 부침개의 범행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니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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