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성필 Oct 09. 2018

도시락에 숟가락 젓가락을 빠트렸더라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


는 학력고사 세다. 그 당시엔 선지원 후시험의 형태로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기 한 달 정도 전에 본인이 원하는 대학을 먼저 정하고, 희망하는 학과를 1,2,3 지망까지 써서 대입 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학력고사 당일에 지원한 학교로 직접 가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수능 입시제도와 비교하면 일부 비슷한 부분도 있고, 또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학업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남 눈치 안 보고 당당히 자기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지원하는 그야말로 전국구 엘리트 학생들도 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원서를 쓸 때쯤이면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하고,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따져 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상의도 하는 등 고민에 빠진다.   


각 대학마다 학생들이 몰리는 인기 학과에는 눈치 싸움이 치열했다. 무난한 합격을 위해 본인의 평소 실력보다 살짝 하향 지원하는 전략도 꽤나 동원되는 방법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재수를 각오하고 본인의 평소 점수보다 높은,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과감히 상향 지원했다. 대부분 쓰라린 실패로 귀결되었지간혹 모집 정원이 미달 된다든가, 아니면 찍은 것들이 모두 정답이 되는, 소위 '그분이 오신 날'이 되어 합격을 하는 경우도 무용담처럼 들리곤 했다.    


처음에 다니던 대학을 한 달여 만에 그만두고 재수를 택했다. 나름 뜻한 바가 있어서 고민 끝에 내린 과감한 결정이었고, 지금도 그때의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다만, 당시에 심하게 반대를 하신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내 고집대로만 밀고 나간 것에 대해서는 늘 죄송한 마음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재수를 시작했고 시간이 흘러 내 인생의 두 번째 학력고사를 맞이했다.   


학력고사 시험 전 날이었다. 부모님과 같이 서울로 올라와서 마침 지원한 대학과 그리 멀지 않은 숙부님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저녁도 잘 먹고 동네 한 바퀴 산책도 하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동네 골목에서 나는 ‘펑’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평소 긴장을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잠에서 깬 그 순간부터 갑자기 이상한 긴장감이 몰려들면서 잠이 오지가 않는 것이었다. 12시를 조금 넘긴 그때부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는 시험장으로 나섰다.    


그 당시엔 대학입시 시험 보는 날을 하늘이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꼭 그날만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추워졌다. 누차 그냥 집에 계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굳이 학교 정문까지 따라 나오셨다. 때문에 부모님들까지 이 추위에 같이 고생하셔서 마음이 불편했다. 더군다나 고향도 아니고 길도 사람도 낯선 서울에서. 그런데 내가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니 그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0년의 세월이 지나 전에 딸내미가 아이들 중 처음으로 수능시험을 봤다. 시험장소까지 데려다주면서 옛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아!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1교시 국어와 국사 시험은 무난하게 봤다. 잠을 못 자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국어시험 문제를 차분하게 잘 푼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도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다. 2교시 수학과 사회, 지리 시험이었다. 결국 잠을 못 자서 생길 것 같은 문제가 터졌다. 수학 문제를 푸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느낌을 받았고,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공식들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낭패였다. 종료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머리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전혀 기능을 하지 못했다. 식은땀이 나고, 손바닥에도 땀이 배어났다. 결국 상당수의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2교시가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옆의 학생들은 각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반대였다. 가방을 다시 다 쌌다. 수학시험을 이렇게 망치고서는 이 대학에 합격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남은 시험 볼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순간 참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이 대학 이 강의실에 다시 와볼 수 있을까? 강의실 복도 끝에서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자". 그래서 복도 끝으로 가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두세 모금 정도 피웠을 때 아래쪽 계단에서 누가 올라오는데 얼굴을 보니  어머니셨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가 너무 놀라서 나는 피던 담배를 떨어트려서 껐고, 어머니는 내가 담배 피우는 걸 모르셨을 터라 더욱 놀라셨다.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 여기 수험생 외에는 못 들어오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라고 여쭈니, “내가 네 도시락에 숟가락 젓가락을 깜빡 잊고 안 넣었더라. 그래서 이것만 갖다 주고 온다고 하니깐 들여보내 주더라” 하신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수학 시험을 망쳐서 나머지 시험을 포기하고 집에 가려던 참인데 이 와중에 숟가락 젓가락이 웬 말씀이신가요.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그때 어머니가 “밥 꼭꼭 잘 씹어서 먹고, 남은 시험 차분하게 잘 봐라” 하시면서 다시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셨다. 담배 피운 것에 대한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밥을 먹고 남은 시간에 십 분이라도 잠을 자고, 오후에 있을 3, 4교시 시험에 최선을 다하기로.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쥐어짜서 마지막까지 집중에 또 집중을 다해 시험을 치렀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아는 문제도 몇 번씩 검증을 하는 등 3, 4교시 시험시간 동안은 단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문제지와 답안지에만 집중했다.

   

보름 정도가 지난 후에 합격자 발표가 났다. 수학 시험 성적이 전체 점수를 많이 까먹는 바람에 1 지망으로 지원한 학과에서는 떨어지고, 2 지망으로 지원한 학과에 합격이 되었다. 당초 목표로 했던 학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뛸 듯이 기뻤다. 그 마음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경우를 겪은 사람은 아마도 극히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합격자 모임을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학력고사 시험 보는 날 도시락에 어머니가 숟가락 젓가락을 애당초 빠트리지 않으셨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딸내미는 첫 수능 시험에서 본인이 준비하고 들인 노력에 비해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점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A대학에 합격하고 등록도 했지만 곧바로 재수의 길을 걸었다. 나는 대학 간판의 의미가 이전에 비해 많이 퇴색되었고 본인 하기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해줬다. 당시 아빠의 충고를 충분히 곱씹어 본 후 딸내미가 조심스럽게 던진 한 마디는 이랬다. "아빠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는데, 내가 좀 억울해서 도저히 이대로는 못 다닐 것 같아. 쉽지도 않고, 잘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그럴까. 본인 스스로가 수긍하지 못하면 절대 대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도 그랬다. 재수하고 싶어 하는 학생의 마음은 재수를 해 본 사람만이 안다. 대학에 합격을 하고서도 재수한 것도 부전녀전(父傳女傳)인가 보다. 딸내미는 자신의 엄청난 인내와 노력에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엄마의 뒷바라지가 더해져 결국 멋지게 재수에 성공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