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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Oct 15. 2018

여름 장대비와 바나나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2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일곱 살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 하나로 아버지를 졸라 부산 출장길에 따라나섰다. 아버지께서 출장 업무를 보시는 동안에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혼자서 숙소에 조용히 있는 조건으로 아버지는 나의 생떼를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당시 고향인 대구에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통일호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고, 곧바로 부산역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숙소를 정한 후에 아버지는 여관 주인아주머니께 내 점심 끼니로 짜장면 배달을 부탁하시고는 일을 보러 나가셨다. 나는 여관방에서 배달되어 온 짜장면을 혼자 맛있게 먹고 하릴없이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2층 여관방 창문 너머로 바깥 골목이 보였는데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당시 무더운 여름이라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었는데 창문 너머로 들리는 여름 장대비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바깥 골목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비는 무서운 기세로 바깥 골목길을 적시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어린 마음에 외로움을 넘어 무서움이 들기 시작했다.


방문을 조금 열어보니 2층 복도의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오히려 방에 혼자 있는 것보다 무서움이 들어서 밖으로 나가 볼 엄두가 전혀 나질 않았다. 슬슬 배가 고파왔고, 이제는 괜히 따라나섰다는 후회마저 밀려들면서 내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울상이 되었다.   

  

또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열렸고 아버지께서 바나나를 손에 들고 오셨다. “많이 기다렸지? 혼자서 안 무서웠나? 배고플 테니 일단 바나나부터 하나 먹어라.”라고 하시면서 바나나를 내미셨다. 바나나를 보는 순간 지난 몇 시간 동안의 외로움과 무서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은 흔한 과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1970년대 중반의 어린아이들에게 바나나가 차지하는 위상이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산 지금의 중장년층은 다 알고 있다. 당시 바나나는 상당히 비싼 과일이어서 집안에 큰 경사가 있거나, 누가 졸업하거나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나 맛볼 수 있었다. 행여나 바나나 한 송이가 손에 쥐어지면, 절대 그것을 바로 먹지 않고 동네 골목에 들고 나와서 끄트머리를 조금씩 맛보게 해주는 조건으로 친구들에게 온갖 자랑과 유세를 떨었다. 나나 친구들이나 참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돈다.    

 

바나나, 복숭아, 포도, 사과, 귤 같은 과일을 제철에 맞게 식탁에 올려 둔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인스턴트 음식과 패스트푸드를 선호해서 손길이 자주 가진 않는다. 어떤 때는  사둔 지 며칠이 지나도록 먹지를 않아서 바나나 껍질이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속도 멍이 들어 있다. 격세지감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먹을거리가 예전보다 다양해지고 아이들의 입맛이 변한 탓이겠지만, 어린 시절 여름 장대비와 바나나에 얽힌 아버지와의 추억을 간직한 나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세태다. 이제 비와 바나나는 아이들과의 추억 만들기에는 적합한 소재거리가 아닌가 보다.  


나는 비를 참 좋아한다. 비가 올 때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살짝 감상적이 된다. 그런데 내가 비와 연관해서 떠 올릴 수 있는 첫 추억은 바로 일곱 살 여름날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부산의 한 여관방 창문 너머로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바라보던 장면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끔씩 그 첫 추억을 반추해 보곤 한다. 4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마치 극장에서 오래된 필름을 돌리듯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추억이다.   

 

먼 훗날 비 오는 어느 날 후배랑 소주잔을 기울이다 비와 아버지에 얽힌 추억을 얘기했더니, 후배가 말하기를 “형! 지금 이게 비 얘기예요? 바나나 얘기예요?”란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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