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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Oct 19. 2018

빗금 친 부분의 면적을 구하시오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4

중고교 시절에 수학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문과를 택한 이유도 수학 공부가 싫어서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리에 대한 이해보다는 상당한 양의 연습문제 풀이와 공식 암기를 통해 수학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원리를 응용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닌데 수학의 경우엔 그게 참 힘들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에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고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풀어내고 싶은 수학 문제의 유형이 있었다. 바로 "빗금 친 영역의 면적을 구하시오"였다. 이상하게도 이런 유형의 문제만 보면 도전 욕구가 샘솟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오래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도를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때 담임선생님이 당시 MBC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호랑이 선생님>과 같은 별명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호랑이 선생님께서 '빗금 친 부분의 면적 구하기' 유형의 수학 숙제를 잔뜩 내주셨다.


그 무렵 나는 야구에 흠뻑 빠져 있었던 터라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구 글러브와 공을 챙겨서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 해질 때까지 야구를 했다. 그런데 그 '빗금 친 영역의 면적 구하기' 수학 숙제를 잔뜩 받아온 날은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야구하러 가자고 해도 꼼짝도 않고 면적 구하기에 집중했다. 총 20 문제 정도였고 뒤 쪽으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졌다. 수학 경시대회에서나 나올 법한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혼자 힘으로 풀기에 한계가 왔다.     


저녁나절부터 풀지 못한 문제를 부여잡고 고심하고 있는데 마침 그날따라 아버지께서 비교적 이른 시간에 퇴근해서 오셨다. 나는 저녁 밥상을 물리자마자 도저히 내 힘으로는 역부족인 문제 세 개를 들고 가서 아버지께 여쭤 봤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여쭤 본 문제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고 심도 있는 조언을 해주셨고, 나는 그 힌트를 바탕으로 마침내 모든 문제를 다 풀고 숙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마음속에 일었다. 내 기억엔 아마 그게 내가 아버지께 공부에 관한 직접적인 도움을 청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등교해보니 모든 문제를 다 푼 친구가 거의 없어서 더욱 의기양양했던 기억이 난다. 한 친구가 그중에 한 문제를 어떻게 풀면 되는지 물어와서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아버지께 배운 한 수를 잘 전수해 주었다. "자,  잘 봐봐. 이 빗금 영역의 면적은 한 번에 구할 수가 없고, 이 삼각형의 넓이를 먼저 구하고, 반원의 영역에서 그것을 뺀 다음에 곱하기 2를 하면... 어쩌고 저쩌고...". 내 인생에 그리 많지 않은 짜릿한 순간이었다. 아버지 덕을 톡톡히 봤다.    


아이들이 나에게 종종 학업과 관련한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예전의 나의 경우와는 많이 달라서 단순히 어떤 문제 풀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향후 진로 문제, 특정 주제와 관련한 전반적인 사회 현상, 트렌드 변화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질문들은 인터넷 검색이나 학원에서는 솔루션을 구하기 힘든 것들이다. 예컨대, 동아리 활동을 하려는데 방송반과 편집반 중에 어느 쪽이 좋을지, 요즘 대세는 이과 쪽인데 '레고 디자이너'가 되려고 하는데도 이과로 가는 게 맞는지,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을 하고 싶은데 대학에서 어떤 분야를 공부하는 게 좋을지 등이다.


각자 알아서 할 수도 있는데 아빠와 상의를 해주니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고, 나의 직간접 경험과 여러 경로를 통해 축적한 역량을 십분 발휘해서 조언해 준다. 이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부모는 조력자이지 의사결정자가 아니다. 아이들이 선택과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부모로서 돕는 것일 뿐 늘 결정은 아이들이 직접 하게끔 했다. 물론 나중에 시행착오를 거쳐 계속 수정 보완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충고도 보태서 해줬다.


아버지께서도 내가 향후 진로 등 중요한 결정에 대해 상의를 드리면 늘 "아버지 생각엔 이러이러한데 잘 생각해보고 결정은 이러저러한 부분을 고려해서 네가 해라."라고 하셨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주셨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적절한 타이밍에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까지도.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이자, 내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여행법>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이라는 것은 수많은 우연들이 산처럼 쌓여 생겨난 것이다. 인생의 어떤 과정을 지나면 우리는 어느 정도 쌓인 우연성의 패턴을 소화시킬 수 있게 되며, 그 패턴 속에 뭔가 개인적인 의미성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만약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것을 이유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아이들에게 수많은 우연을 경험하게 해주는 조력자이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이유를 붙이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향후 얼마나 더 내게 자신들의 일을 상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늘 이제껏 해왔던 똑같은 방식으로 대할 것이다. 물론 내 방법이 100% 좋은 방법이라 말할 순 없지만, 어차피 정답이 없는 시대가 아닌가. 나는 내 아이들을 믿는다. 내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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