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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Oct 21. 2018

아버지, 축구 보실 건가요? 야구 보실 건가요?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5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82년에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생겼다. 당시 실업야구팀이 여럿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팀만 해도 현역 군입대 선수들로 구성된 경리단, 한일은행, 한국화장품, 제일은행, 롯데(실업팀), 포항제철 등이 있었다. 어릴 때라 실업야구와 프로야구의 차이를 잘 몰랐지만, 방송에서도 엄청 떠들썩하게 홍보를 한 터라 새로 출범하는 6개 프로야구팀 - 삼성 라이온즈(대구), OB 베어즈(대전), 롯데 자이언츠(부산), 해태 타이거즈(광주), MBC 청룡(서울),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 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게 컸다. 각 구단별로 다양한 혜택과 선물을 제공하면서 어린이 팬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개막전. 그날은 3월 말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에 축구 국가대표 혹은 그에 준하는 중요한  축구경기 중계가 있었다. 기억이 맞는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야구 중계 시간과 축구 중계 시간이 겹쳤다.


나는 무조건 야구 중계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하나밖에 없는 TV 채널 선택권은 불행히도 나에게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께 조심스레 여쭤봤다. 오늘 오후에 축구 보실 건지, 야구 보실 건지를. 이건 뭐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도 아니고.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아니면 원래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둘 다 좋아하지만, 야구가 조금 더 좋다. 게다가 오늘은 프로야구 개막전이니 이따가 같이 TV 중계를 보자."라고 하셨다.

나는 토요일 4교시 수업이 끝나자 곧장 집으로 와서 TV 앞에 자세를 잡고 야구 중계가 시작되기를 기다렸고, 조금 후 아버지께서도 퇴근하고 오셔서 TV 앞 관람석에 합류하셨다. 어머니께서도 부자가 함께 TV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걸 보시고는 쥐포를 구워다 주시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셨다. 고향이 대구인지라 자연스럽게 '삼성 라이온즈' 팀을 응원하게 되었는데, 개막전에서는 당시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MBC 청룡' 팀과 맞붙었다. 방송사에서 창단한 야구팀이라니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국내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홈런을 이만수 선수가 기록하고, 황규봉 선수의 역투로 '삼성 라이온즈'가 쉽게 이기는가 싶더니만 'MBC 청룡'의 끈질진 추격이 이어졌고, 급기야 연장 10회 말에 이종도 선수가 '삼성 라이온즈'의 구원투수 이선희 선수를 상대로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을 쳐서 'MBC 청룡'이 경기를 뒤집고 승리했다. 나에겐 그 만루홈런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 이게 프로야구구나. 아! 이게 역전승, 역전패라는 거구나.


그날의 경기는 내가 응원하는 팀의 승패를 떠나 프로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 신호탄이었다. 이선희 투수는 그 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OB 베어스'의 김유동 선수에게 또 만루 홈런을 맞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면서 비운의 투수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즈음에 아버지와 함께 '대구 시민야구장'에 프로야구 경기를 처음으로 직접 관전하러 갔다. TV 중계로만 보던 야구를 선수들이 공을 던지고 배트로 치고 글러브로 받고 하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아쉽게도 한 개의 파울 볼도 잡지 못했지만, 파울 볼이 내가 앉은자리의 옆쪽에 또 뒤쪽에 떨어지는 것도 나를 경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오롯이 프로야구의 팬으로 사로잡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프로야구 광팬으로 살아가고 있다. 프로야구 시즌 중에는 단 하루도 야구 중계를 보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다. 실시간 중계를 보지 못하는 경우엔 반드시 하이라이트 편집본이라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든다. 누군가는 시간 넘게 걸리는 야구 경기가 지루하다고도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내가 지금 마운드에서 던지는 투수인 양, 배팅 박스에 들어선 타자인 양, 더그아웃에서 작전 지시를 하는 감독인 양 경기를 몰입해서 보는데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야구장에 데리고 다녔는데 최근에 딸내미가 포로야구에 흠뻑 빠졌다. 그것도 아빠의 응원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둘째 녀석은 유럽 축구를 훨씬 좋아하긴 해도 야구에도 살짝 관심은 있는 것 같다. 내가 TV 중계를 보고 있을 때면 지나가다가 요즘 삼성 몇 등이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이지만 지금 저 선수가 누구냐고 묻기도 한다.


몇 해 전에 우연한 기회로 표를 구하게 되어서 대구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이승엽 선수의 은퇴 경기와 은퇴식에 둘째와 같이 갔다. 티셔츠, 손수건 등 기념품도 받았고, 이승엽 선수의 홈런 개수 만큼인 465명을 초대한 은퇴 행사에도 뽑히는 행운도 누렸다. 


그라운드에 내려가 직접 이승엽 선수의 은퇴식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면서 하이파이브 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매우 운 좋게도 이승엽 선수랑 하이 파이브를 나누는 장면이 TV 중계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훗날 야구와 관련된 추억을 말할 기회가 있다면 이 날의 감동적인, 감격스러운 추억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TV 중계화면에 잡힌 나와 둘째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아이들과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 공감하는 게 예전에 비해 많이 어려워졌다. 또한 아이들이 친구들을 먼저 챙기는 나이가 되니 부모 된 입장으로 살짝 서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도 그 나이땐 그랬다. 속으론 다소 괘씸한(?) 생각이 들어도 적어도 겉으로는 쿨한 척해야 한다. 대신 길어진 평균 수명만큼 오랜 기간을 더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아버지랑 나랑 둘째 지훈이랑 삼대가 같이 야구 경기 직관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TV 중계를 같이 보는 것은 가능하니 다음에 한번 시도해봐야겠다. 어머니께 쥐포 구이 요청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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