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과 착함의 사이에서
“00아 괜찮아, 울어도 돼. 사실 산타는 없거든”
쇼미더머니에서 한 래퍼가
자신보다 어린 참가자에게 던진 이 말은,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도 겨울이 설레고,
크리스마스가 기대되며,
거리 곳곳에 보이는 산타가
괜히 반가운 어른이기 때문일까?
‘산타가 없다’는 말은
어린 시절의 환상을 깨뜨리는 선언 같지만,
생각해 보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한때 우리가 가졌던
순수함의 흔적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순수함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스치는 문장은
이상하게도 “울면 안 돼”였다.
어릴 적 나는 자주 울었다.
사소한 일에도 금세 무너졌고,
눈물이 먼저 반응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늘 고민했다.
울보였던 나는 과연 ‘착한 어린이’였을까?
착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울보인 나는,
‘착한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순수함과 착함은 결이 조금 다른 단어였다.
‘순수함’은 때 묻지 않은 마음,
계산 없이 움직이는 본질적인 선의,
아직 세상에 상처받기 전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좋아서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마음.
그저 이유 없이 빛나던 감정들.
반면 ‘착한 어린이’는,
어른들의 말에 순종적이고,
조용히 혼자서도 잘하며,
칭찬받기 좋은 행동을 하는 아이에 가깝다.
순수함이 ‘있는 그대로의 나’라면,
착한 어린이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나’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엔 순수한 의도로 했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실수가 되었던 적도 있었고,
좋은 마음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기에.
그리고 여전히 눈물로 성장하고 있기에,
이제 나는 안다.
“울면 안 돼”는 틀렸다는 것을.
눈물은, 그저 무너져보지 못한
순수한 감정표출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여전히 울보어른이지만,
이제는 그게 부끄럽지 않다.
다만, 무작정 순수하기보다
선의를 아는 어른.
울음을 숨기는 착한 어린이 대신,
눈물의 의미를 아는 착한 어른이 되고 싶다.
울보였던 나를 꾸짖는 사람이 아니라
우는 아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포용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순수함이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