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서부터 나름 꾸준히 부지런을 떨고 있다. 그팩 라이브러리 서가를 탐험하며, 단행본과 매거진을 빌려오는 일이다. 단행본은 마케팅이나 IT, 스타트업 관련 책이나 독립출판물을 주로 보고 있고, 매거진은 '매거진 B'를 훑고 있는 중이다. 특히 독립출판물은 쉽게 만나지지 않는 책이 대부분이고, 흐름이나 완성도를 가늠하기 어려워 그야말로 흥미진진 대탐험이다. 여기, 그 중 두 권의 기록.
열네 명이 각자의 기억 속 가장 의미 있는 집(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기억인)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형태, 배치는 물론이고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곳에서의 일상은 어땠는지가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다 잊은 것 같았던 기억 속 풍경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어릴 적, 리모델링하기 전 시골 할아버지 댁은 대청마루로 방이 연결되고, 부엌엔 아궁이가 있는 농촌 한옥이었다. 까맣게 윤이 나던 마룻바닥, 마치 내가 차지한 아지트 같았던 사랑방, 탈곡기 소리 요란하던 창고, 할아버지 그 자체였던 방앗간, 맨드라미 꽃이 흐드러지던 수돗가. 풍경뿐 아니라, 그때의 냄새와 그때의 촉각마저 떠올랐다.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던, 그래서 읽는 내내 희한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다.
p.29
집이 폐가가 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들어가 살아야겠지만 딸은 안 된다고 했다. 서운한 마음을 참고 가끔 집을 찾아 관리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는 와중에, 어느 날 집에 들렀다가 대문간에 달린 새 문패를 봤다. 문패에 친척인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물건이 집에 남아 있었지만 따지지도 못하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현숙 씨는 그날 이후 고향에 가지 않는다.
농촌주택 - 심현숙(1958년생, 자영업, 김포)
최초의 집은 내가 최초로 살았던 집 이야기가 아니다. 내게 최초로 '집'의 기억을 주었던 공간 이야기다. 집을 집으로 인식하게, 기억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결국 그 안에 함께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집'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은 '가족'이 된다.
일종의 묘지 탐험기, 묘지 여행기, 묘지 견문록이다. 분당 천주교 소화묘원, 서울시립승화원, 현충원, 망우리공원, 대구교도소 무연고자 묘지, 부산 비석문화마을 등을 둘러본 이야기다. 쉽게 찾아갈 수 없으니 막연히 단어로만 알던 장소인데, 이 책을 읽으며 구체적인 '풍경'으로 알게 됐다. 찾아가는 길이 상세히 안내돼 있지만, 역시나 쉽게 찾아가긴 어렵겠지 싶어 꽤나 열심히 읽었다.
한 가지 더. 중간중간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오더라도, 꾹 참고 두세 장 넘겨보면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가 등장한다. 꾹 참느라 앙다물었던 입매에 힘이 풀린다. 일단은 잠시 멈춰서, 작가의 생각 흐름을 따라가보는 것. 이게 독립출판물을 읽는 재미일까.
p.69
운명은 왜 최후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이에게서 도리어 삶을 뺏었는지. 그리고 그에게서 앗은 생명을 왜 내게 주고 있는지. 정작 나는 왜 여태 내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헤매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p.142
근데 당신이 지금 하는 것처럼 다른 망자들을 쫓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오롯이 내가 자기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거든요.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지, 장례는 수목장이든 화장이든 뭘 어떻게 할 건지... 그리고 우리가 아까 법화경 비석 얘기했었죠? 법화경에서 항상 강조하는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니에요. 일단 중요한 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
p.144
사라진다는 건 사람에게도, 사람 아닌 무언가에게도 전부 공평하니까. 그러니까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면 어차피 똑같은 끝이 아니라 각자의 삶 어딘가에서 찾아야 할 테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자, 그렇다면 이제부턴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에 좀 충실해볼까.
지금 이 순간. 누구나 다 하는 뻔한 결론이라도 그리로 향하는 여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책 역시 마찬가지. 처음부터 예상 가능한 뻔한 결론이지만, 그 과정이 참 신선했다. 더 많은 독립출판물을, 더 신선하고 다양한 생각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이번 주에는 무슨 책을 빌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