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 『눈사람 자살 사건』(달아실, 2019)
눈사람은 그저 따뜻해지고 싶었을 뿐이였을텐데, 별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너무나 길디긴 겨울이라지만, 눈사람에겐 살아갈 수 있는 단 3개월의 시한부 선고이지 않았을까. 또 다른 겨울을 보기 위해선 차디찬 냉동실에서 홀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버거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좁은 공간이 눈사람에겐 관에 묻힌 채 죽어있는 죽음과 별다를 바가 없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생존의 연장을 선택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결정을 내린 눈사람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결국 끝이다다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너는 참 복잡했겠지. 그리고 그 복잡한 생각들의 끝에 도달한 것은 결국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의 본질적인 이유에 도달한 것이겠지.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타의 간섭 없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했다는 것. 겨울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눈사람들 사이에서 너의 죽음은 누군가에 의해 기억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봄의 꽃이 피어남에 따라 희미해져 가겠지.
결국 겨울에 그려진 하얀 스케치는 봄의 화려한 유화 물감에 묻혀진다. 어차피 기억되길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사라져간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이, 그렇게 무던히 시간은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