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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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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Apr 22. 2018

길 위에서

마음의 콘크리트를 부수면 새 길을 만날 수 있다

                                                          길 위에서     


길은 다시 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노란 개나리 덤불 새로 난 작은 길이 늦가을 밤나무 길로 이어지고, 오솔길 끝자락을 넓은 모래사장이 매듭짓듯 길은 항상 어딘가로 통해 있다.

지난 가을 끝물부터 시작된 집 앞 소방도로 공사 때문에 조용한 낮을 한참이나 잃어버렸다. 공사하는 수개월 동안 담을 허물고 하수관을 교체하고 전신주를 옮기고 노후한 콘크리트 바닥을 헤집느라 굴착기가 종일 쉴 새 없이 온 골목을 쪼아대고 부셔댔다.

 머리를 쥐고 흔들어대는 굉음으로 이는 편두통을 피해 바깥으로 나가려 해도 완전히 파헤쳐진 도로 탓에 바짓부릴 들고 까치발로 걸어야 했고, 주차도 집 앞이 아닌 두 블록 너머로 옮겨야 해서 외출마저 녹록치 않았다. 쉴새없이 날아드는 흙먼지로 창문을 열 수 없음은 물론이고 어쩌다 볕 좋은 때 널어놓은 이불청에 까맣게 돌가루가 앉아 빨래를 망치기 일쑤였다.

가끔 수십 년을 함께 한 이웃들이 주차와 자재 쌓아두는 문제로 목청을 높이다 드잡이를 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빗물이 고인 흙길을 오가느라 사람들의 이마엔 짜증이 자글거렸고,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공사에 투덜대는 불만의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곳을,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공사장 소음에서 벗어나고, 좁은 골목길에 둘러싸인 회색 도심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이 내려다뵈고 훈향 나는 나무 아래에 가면 두통이 싹 가시고 심신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단 하루도 떠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얼마 전 새 도로가 아스콘 작업을 끝내고 위용을 드러냈다. 군데군데 패여 있고 좁고 가팔랐던 도로 대신 널찍한 도로가 곧게 뻗어 나갔다. 도로 폭이 많이 넓어져 차 두 대가 지나고도 남을 정도가 되어 예전처럼 마주 오는 차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없어졌다.

새 도로가 완성되면서 주변 풍광에도 변화가 일었다. 새 길 위로 동네 사람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배드민턴을 들고 나와 하늘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드잡이를 했던 이웃이 함께 앉아 막걸리를 기울였다. 새 길로 인해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정원수와 여름이면 노랗게 익어가던 비파열매, 매초롬한 감나무는 잃어버렸지만, 대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나는 공간을 얻어 훨씬 넉넉해졌다.

넓어진 길 덕에 마음까지 넓어져 어둠이 내리는 새 길 위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바람결을 타고 좋은 향이 흘렀다. 그간 그리워했던 향이었다. 내가 불평하는 사이 새 계절이 묵묵히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꼭 도심을 벗어나야 계절을 느끼고 인생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콘크리트 건물 위에서도 하늘은 빛나고, 도로변에 서 있는 나무 위에도 바지런한 새들은 열심히 집을 짓는다. 내가 마음의 콘크리트를 부수면 어디서든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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