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전환점
그날은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서귀포시에 넘어가기로 했다. 섬 가운데 한라산이 버티고 있는 덕분에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오갈 때 넘어간다고 표현한다. 핸디솔루션에 관심 있는 숙소 중 산 너머 있는 서귀포시에 있는 숙소를 추려 미팅을 잡았다. “내일 미팅있으니까 오늘은 술 마시마.” 신신당부했다. 9 to 6 시스템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프리한 생활이 더 익숙한 고등학교 동창을 계몽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10시 미팅이어서 늦어도 8시 40분에는 출발해야 했다. 준비를 마치고 전화를 했지만 고등학교 동창은 받지 않았다. 어차피 5.16도로를 타고 한라산을 넘어갈 예정이라 집에서 출발하면서 사무실에 들러서 데리고 갈 생각에 일단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무실은 집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 거리였다. 도착할 때까지 전화는 받지 않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날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온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먼저 출발해서 오전 미팅할 테니깐 정신 차리고 넘어와.” 짜증이 섞였었다. 사업을 하면서 동업자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던데 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서귀포로 향했다. 핸드솔루션을 이해한 지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핸디솔루션을 공식적으로 혼자 영업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보일 때까지 깊게 파는 스타일이어서 기능은 이미 모두 숙지했지만, 솔루션의 기획 의도부터 모든 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주요 미팅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의 최선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내 머릿속엔 실패한 영업이었다.
오전 미팅을 끝내고, 점심시간에 맞춰 넘어오기로 한 고등학교 동창을 기다렸지만 12시쯤 연락이 끊겼다. 과연 비즈니스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배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빠져야 하나? 많은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다시 핸디솔루션으로 세팅하고, 오후 미팅을 준비했다. 미팅은 순조로웠고, 이 비즈니스의 가능성과 끝이 공존하는 참 복잡한 상황이었다. 8시 50분에 제주시에서 출발해 4시 30분이 돼서야 다시 제주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점심시간부터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동창이 참 괘씸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시간이면 정신 차리고도 남아야 했고, 미팅이 어땠는지, 친구의 기분은 어떤지 궁금해야 했다. 그런데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다. 원래는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일단 오늘은 마무리하고,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오늘의 일을 심.각.하.게.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그랬다. 10년 넘은 관계를 통해 알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복기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을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차를 사무실로 돌렸다. 이때부터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무 일 없듯이 “왔어?”라고 하길 바랐다. 차를 세우고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고, 복도를 빠르게 걷는데 공기가 많이 내려앉아 있었다.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서도 그냥 “왔어?”가 듣고 싶었다. 사무실인척하는 거실에 TV는 고등학교 동창이 가장 좋아하는 NBA가 틀어져 있어야 했고, 게임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동창은 컴퓨터 앞에 앉아 롤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동창은 사무실인척하는 거실이 아닌 방에 누워 있었다.
가장 먼저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했다. 또 다른 친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바로 119에 신고했다. 거실 테이블에는 담배가 놓여 있었다. 아마 그때 담배 옆에 라이터가 있었다면 10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을 것이다. 누워 있는 고등학교 동창을 여러 번 불러도 기척이 없자 축 쳐진 친구의 팔을 흔들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을 때 나는 패닉에 빠져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생돼지고기를 만질 때 차가운 껍질에 척하고 달라붙는 감촉으로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의 비즈니스는 올스톱됐다. 고등학교 동창을 잘 보내주기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과 많은 생각과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시간이었다. 퇴사 전부터 그렸던 새로운 시작이 2018년 5월 4일 끝이 났다. 생각보다 빠르게 몸과 마음을 추슬렸다. 일주일 후 또 다른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둘은 핸디솔루션을 만들어가자고 결정했다. 또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