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칼바람이 부는 날, 나는 내 생일을 기념할 겸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닷새간 머물렀는데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워 혼자였다.
여행 첫날엔 어둑한 하늘에 느닷없이 우박이 떨어지는 통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제주 서귀포시의 하늘은 전날과는 다르게 새파랬다. 나는 이 맑은 하늘을 놓칠 새라 지친 몸에 설레는 마음으로 동글동글한 동백나무가 가득한 '동백포레스트'로 향했다. 도로의 양옆은 현무암이 차곡차곡 쌓인 돌담길이 쭉 이어졌다. 돌담 밖으로 탐스러운 귤들이 주렁주렁 열린 귤나무 가지가 삐져나와있는 통에, 차를 멈춰세우고 담을 넘어온 귤들을 훔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동백포레스트의 주차장 입구는 들어가려는 차들과 떠나려는 차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유달리 좁은 경차 전용 구역으로 안내받았다. 마침 딱 한 자리가 비어 얼른 차 뒤꽁무니를 집어넣었다.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자리를 잡는데, 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끽.이나 끽-, 끽!이 아닌 끽? 소리가.
그러자 주변의 아이들이 꺅꺅대며 자갈밭을 뛰어다니는 소리, 주차요원이 주차봉을 흔들며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소리, 앙증맞은 귤모자를 쓴 연인의 속닥이는 소리들이 아득해지며 저 멀리 사라졌다. 누가 그 순간을 소음계로 측정했다면 분명히 그 어떤 소리보다 나의 심장이 뛰어대는 소리가 제일 컸을 테다.
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차요원은 정확히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고, 눈이 마주치자 다시 호루라기를 불며 안내를 계속했다. 어린아이들은 여전히 뛰어다녔고, 젊은 연인은 헉! 하고 숨을 내뱉더니 아까보다 더 세차게 속닥여댔다.
그러니까 나의 생애 첫 차 사고는 제주도 동백포레스트의 경차 구역 주차장에서 일어났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다행히도 내가 빌린 모닝은 흠집이 나지 않았다. 내 오른쪽에 주차된 흰색 레이에 5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의 검은 칠이 생겼다. 앞 범퍼의 오른쪽 부분에. 관광지에선 대부분이 그렇듯 검은 칠이 묻은 그 레이도 렌터카였다. 나는 차량에 적힌 번호의 주인, 롯데 렌터카 고객센터 안내원, 상대의 렌터카 고객센터 안내원과 전화를 하며 량현량하보다 더 많은 하-를 내뱉어댔다.
“하- 안녕하세요. 제가 주차를 하-다가, 여기. 살짝 긁혔거든요. 하아, 정확히는 검은색 칠이 묻었는데요. 하-”
갖은 속상함이 묻어 나오는 하-와 변명으로 범벅된 나와는 달리 다들 아주 평온하게 대응했다. 연락을 받은 레이 주인도 곧 오더니, “아- 이거, 손으로 살살 문대면 지워질 것 같은데…”라고 했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사고를 목격한 주차요원과 커플이 너무 신경이 쓰였을 뿐이었다.
렌터카 고객센터 안내원의 덕에, 사고 접수를 하고 나는 그제야 동백꽃을 보러 갔다. 동백포레스트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로 예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단체로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들, 동백꽃보다 더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 그 속에 괴로운 나. 그래도 이렇게 처지고만 있을 수는 없어 쥐어짜 웃으며 셀카를 몇 장 찍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렌터카는 다행히도 사고가 나더라고 따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완전자차 보험으로 빌렸기에 따로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사고를 냈다는 사실에 숙소에서 끙끙 앓았다. 그 이후 주차 연습 앱을 깔아 종일 연습했다. 짬이 날 때마다 유튜브에서 운전 강습 영상을 봤다. 차로 이동하면서는 초보의 마음으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여행을 하며 매일 4~5시간 정도 운전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운전이 참 많이 늘었던 것 같다.
가끔 제주도 여행 사진을 구경하다가 동백꽃과 함께 찍은 내 사진을 마주한다. 사진 속 나는 입가에 경련이 난 것처럼 웃는다. 동백꽃은 경고 신호등처럼 아주아주 붉고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