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례식에는 파티를 해줘, 서른아홉에 이별하는 법

드라마 <서른, 아홉>

by 양맨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마흔이라고 답한다. 영재는 아니었고, 달리기는 제법 빨랐지만 육상선수를 할 수준은 아니었던 일곱 살의 나는 남들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나를 '빠른 년생'이라고 불렀다. 유치원 졸업 사진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남들보다 1년 일찍 정규 교육 과정에 진입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과 '족보'가 꼬이니까 나이를 잘 이야기해야 한다는 건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렇게 나이를 올려치기(?)하며 어느덧 마흔, 아니 서른아홉이 되었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몇 해 전, 친애하던 선배의 부고를 들었다. 함께 캐치볼을 하면 늘 쪼그려 앉아 볼을 받아주던 사려 깊은 선배였다. 그날은 '본인상'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날이자, 준비 없는 이별이 가져다주는 상실감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이었다. 그날의 공기는 어딘가 낯설었다. 보통 장례는 '재회의 장치'로 기능한다고 믿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며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인상은 달랐다.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 앞에서 모든 언어는 증발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빈 잔을 채웠다. 그날 이후, 친애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늘 상상하게 됐다. 헤어질 땐 꼭 웃으면서, 손 흔들고 인사하기. 평범한 약속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날에서야 알았다. 어쩌면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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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

드라마 <서른, 아홉>은 시작부터 결말을 밝힌다. 주인공 찬영의 시한부 진단과 장례식 장면이 첫 회에서 드러나고, 12회에 걸쳐 드라마는 예정된 끝을 향해 걷는다. 그 여정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떠날 사람과 남겨질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정돈되어 가는 길이었다. 이 작품은 '무엇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 묻는다. 매 회차는 사건이 축적되기보다는 감정이 이동한다. 불안과 분노, 체념. 끝엔 수용과 평온함. 물결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리듬 안에서 인물들은 자신을 다독이는 법을 배워간다. 드라마의 리듬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처럼 — 마치 삶의 후반전을 자각하는 것처럼 — 잔잔하지만 단단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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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리스트를 브런치 리스트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회에서 찬영이 쓴 '부고 리스트'가 미조와 주희의 '브런치 리스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부고는 부재의 언어지만, 브런치는 일상의 언어다. 셋의 리스트는 문자로는 같은 모양이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끝을 향하는 것과 남은 시간을 함께 쓰겠다는 약속의 차이. 미조와 주희는 찬영의 죽음을 삶의 언어로 번역했다. 브런치 장면은 남겨진 이들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조용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이 드라마가 남긴 가장 조용하고 깊은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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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서사로서의 미완

이 작품은 세 명의 여성이 중심에 선 드라마다. 우정, 일, 가족, 그리고 죽음까지 삶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여성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인물은 여전히 연애라는 장치를 통해 감정의 완결을 얻는다.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기보다는 사랑을 통해 안도하는 서사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성의 삶을 스스로서의 서사로 완성하지 못한 채,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다독이는 인물들. 그 미완의 지점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한계 속에서도 이 드라마는 우정과 죽음을 병치하며 여성의 삶을 '감정의 깊이'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2회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의 시간을 투자해서 작품을 봤다면, 긍정적인 면만 보고 기억하는 편이 건강에도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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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장면

"자, 이제 우세요"

제작진이 작정하고 만든 찬영의 영상 편지 장면에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찬영의 마지막 인사는 슬픔보다 평화를 담고 있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웃었다. 동시에 친애하는 누군가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내 공을 받아주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준비된 이별과 갑작스러운 이별 사이의 거리는 결국 관계의 온도로 메울 수 있는 걸까 생각한다. 어쩌면 누군가를 친애한다는 건 그 사람과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일지 모른다. 혹시 두려워하고 있다면, 두려움 속에서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용기를 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며 나는 관계의 정의에 관한 묻는다. 가까움은 습관이 아니라 선택이고, 친밀함은 온기가 아니라 지속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어쩌면 '친애한다'는 말은 드라마 속 대사처럼 '친밀하고 소중하다'라는 단순한 애정을 넘어 끝까지 함께 머물 준비가 된 마음이 아닐까? 누군가를 오래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부재까지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언어로서의 친애.


그리고 관계의 지속에 대해 생각한다. 관계의 끝에 남는 건 슬픔이 아니다. 슬픔 지나가도 남는 사람의 온기,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배웅할 것인가 — 오직 그물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