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계 안쪽으로
그 해 5월은 내 삶에서 가장 뜨겁고 느린 시간으로 기억된다. 공항에 막 착륙했을 때 내 피부를 덮치던 습한 공기, 순박한 갈색 빛 표정의 사람들, 달뜬 표정으로 날 맞이하던 친구의 반짝이는 얼굴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다. 군사정부가 들어선 그 나라에서는 군 관련 프로그램으로 도배된 TV에서조차 매일 한국 드라마를 방영해줄 만큼 한국 드라마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저녁 시간이면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나라 자막이 나오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자연스레 한국 사람인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나는 그 나라의 옛 수도에 있는 친구 R의 이모네에 머물렀다. R의 이모는 부잣집 사모님이었다. 그녀는 그 도시에서도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어느 한적한 동네의 대궐 같은 집에 살았다. 그녀에게는 어린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에 다녔다. 나는 2층에 있는 딸들의 옆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R의 이모는 온몸 구석구석 황금으로 치장하고 매일 색색의 론지를 바꿔 입으며 도시 여기저기로 날 데리고 다녔다. 물론 그녀의 부와 인맥을 자랑하는 화려한 곳들뿐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 그녀의 자동차 안에서 바라본 거리 풍경은 단조롭다 못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낮이든 밤이든 평상 위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과 거리의 가난한 행상인들. 볼에 타나카를 바르고 수줍게 웃는 여자와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 R의 이모가 자신의 부를 뽐낼수록 거리에 펼쳐진 그 나라의 민낯은 한층 더 도드라졌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임에도 아무 사심 없이 건네는 그들의 미소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고, 사심이 담긴 이모의 호의가 자꾸 목구멍에 걸렸다.
새벽이면 근처 사원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과 불경 소리에 잠이 깼다. 세수하러 욕실에 들어갈 때마다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을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동그란 식탁에 다 함께 둘러앉아 혼자 포크를 들고 흩어지는 밥알과 사투하는 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모기에게 물어 뜯겨 울긋불긋하다 못해 우둘투둘해진 팔다리를 피나도록 긁으며 울던 밤이면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실의 시계를 늦춰볼 심산으로 낯선 땅에 왔는데, 더디게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머지않아 나 역시 더위에 축 늘어지다 못해 현실감각마저 빼앗긴 채 평상 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처럼 이 나라의 풍경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기억을 몽땅 팔고 국경시장의 일부가 되어버린 로나처럼.
달이 기울기 직전 사라져 가는 국경시장에서 주인공이 가까스로 탈출했듯 나 역시 한 달 만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R의 이모가 주선해준 직장에서 일하려면 몇몇 서류가 더 필요했고 이를 갖추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던 것.
그 나라를 떠나는 날, 억수같이 달구비가 쏟아졌다. 나는 R의 이모 차를 타고 공항에 갔다. 그녀는 내 가방에 망고 두 알을 넣어주며 세관원에게는 따로 말해뒀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한국 화장품이 갖고 싶다는 말도 넌지시 전했다. 내 머릿속에는 그저 어서 빨리 이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그 도시는 온통 회색빛에 젖어 있었다. 황금색 파고다만이 그 빛을 뽐내며 회색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두 번 다시 그 나라를 찾지 않았다.
<국경시장>을 읽다가 한없이 뜨겁고 느렸던 그 시간들이 불현듯 떠오른 건 주인공 일행에게 당당히 음식을 구걸해먹던, 다리를 저는 걸인의 대답에서였다.
결함은 대단한 자산이야. 시장 상인들이 번갈아가며 잘 돌봐주거든. 침구도 바꿔주고 먹을 것도 쟁반 가득 날라다준다네. 보름에 한 번 시장으로 나오면 이렇게 고급 요리도 맛보고 말야. 그런데 걸을 수 있게 되면…… 끔찍해! 안락한 습관에서 쫓겨나 갑자기 생활인이 되어야 하다니. 그건 기적이 아니라 재앙이야.
-김성중, <국경시장> 중에서
이십 대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던 내가 그 나라로 떠났던 이유가 걸인의 대답 말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시 나는 생활인이 된다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코 안락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병행하며 살았으니까. 다만, 내가 느끼기에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은 생활인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그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뜻하는 거였다. 어찌 보면 내게 불확실성은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를 무한한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그랬기에 생활인이 되는 게, 뿌리를 내리고 방향을 잡는 일이 나는 극도로 두려웠다.
‘국경시장’ 같던 그 나라를 떠나온 지 어느덧 십 수년이 흘렀고 나는 번역가가 되어 도서관에 뿌리내린 채 완전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경시장>을 읽은 뒤 김성중의 소설은 내 취향이 되었다. 취향이 생기는 건 우연에서 비롯하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자리 잡으려면 반드시 내 삶과의 접점이 필요하다. 작가가 구현해낸 이야기 속 세상이 내 삶의 어느 한 시절과 맞닿아 있었던 것처럼. <국경시장>을 읽을 때면 자연스레 그해 5월이 떠오른다. 내 시절 ‘방황하는 청춘’의 종지부를 찍었던 그 나라에서의 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