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다. 종종 어제 일도 헷갈리고 깜빡 잊어버린다. 그런 내가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8년 전, 내가 11살 때. 나는 사는 곳과 다른 지역의 학교에 다녔다. 엄마가 매일 차로 학교에 데려다줬고 또 데리러 와주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난 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조수석에는 엄마의 겉옷과 가방이 놓여있고, 가방에는 서류처럼 보이는 뭔지 모를 종이 뭉치와 처음 보는 분홍색 수첩이 들어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내게 엄마가 말했다.
"파링아, 오늘 잘 지냈어? 있잖아, 엄마가 전할 소식이 있는데... 들으면 아마 놀랄 거야."
엄마는 운전하느라 앞을 보고 말했지만, 백미러에 비치는 표정에서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엿보였다. 어서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과 그러나 조심스러운 마음이 느껴지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던 것 같다. 짐작할 만한 거리는 전혀 없었는데, 엄마가 전해주려는 소식이 무엇인지 왠지 알 것 같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담담했다.
흠. 동생이 생겼구나.
계획해서 생긴 아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차 안에서 나는 너무 평온했다.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 왜일까 이제 와서 이유를 추측해본다. 사실 나에겐 두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 한 명 있다(그러니까... 나는 세 자매 중 맏딸이다. 우리 자매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나중에 하겠다). 이미 두 살 아기일 적에 동생을 맞이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눈치가 빨라서? 혹시 막내와 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던 걸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걔를 느꼈나? 그래서 우리가 유독 잘 통하는 건가...!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안 믿기엔 꽤 귀여운 결론이니까 마지막 이유가 맞다고 치자.
내가 막내를 처음 만난 곳은 병원이다. 막내는 큰언니를 빨리 보고 싶었는지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예정일보다 한 달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내가 처음 본 막내의 모습은 작은 몸 이곳저곳에 약을 투여하는 호스와 연결된 주삿바늘을 꽂은 채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얘가 내 동생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그 아기가 걱정부터 되었다. 주삿바늘 때문에 많이 아프진 않을까. 칙칙한 병원 천장만 보고 살려니 답답하겠다. 앞으로 약한 몸으로 크는 건 아닐까.
8년 뒤 오늘, 나는 19살이다. 막내는 9살이다. 다행히 막내는 큰 병치레 없이 잘 컸다. 오히려 걱정과는 달리 아주... 튼튼하게 컸다. 진짜 크다. 키가 내 쇄골뼈까지 온다. 초등학교 2학년인 지금 초등학교 4~5학년 사이즈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 말도 똑 부러지게 한다. 그리고... 날 주로 이름 석 자로 부른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른 호칭을 강조하거나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어서 어떻게 불리든 상관은 없다. 날 호출하는 듯한 우렁차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좀 웃길 뿐이다.
"양파링(내 이름)! 가만히 있어,언니가 안 데려다줘도 된다니까. 잘 갔다 올게~"
이 글을 쓰는 도중, 막내가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 집 근처 가까운 곳에 있는 걸어서 5분 거리의 학원이긴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 차도를 두 번 건너야 한다. 처음에는 엄마나 내가 데려다주고 데리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은 내가 혼자 가볼게. 도전해볼게. 대신 올 때는 데리러 와줘."
그렇게 집에서 학원까지 혼자 가는 것으로 시작해 이제는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까지 오는 길도 씩씩하게 혼자 걸어온다. 아까도 엄마가 내게 막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지만 막내가 거절했다. 기특하다. 씩씩하게 자라줘서 새삼 고맙다.
정말 빠르게 배우고 쑥쑥 자라는 막내와 함께 산 지 햇수로 9년째가 되었다. 둘째와는... 17년째...? 아득하네. 내게 동생들은 유독 소중한 존재이다. 가장 힘이 되는 동시에 나를 굉장히 힘들게 하기도 한다. 함께 하는 일상은 매일이 비슷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의 소소한 웃음과 감동을 서로에게서 얻는다. 그런데 막내도 언젠가는 언니와의 세대 차이를 느끼고 지 친구들이랑만 놀려고 하는 무적의 사춘기 시기를 맞을 것이다. 내년에 법적 성인이 되는 나는 점점 공부니 진로 고민이니 하는 내 생활을 살아내느라 바빠서 동생과 놀아줄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줄고 있다. 둘 다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막내의 마지막 한 자릿수 나이가 지나가기 전에, 나의 마지막 십 대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일상을 기록해두고 싶다. 또한 10살 차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차이의 동생과 살면서 느끼는 이런저런 고유한 감정들을 글로써 스스로 정리하고, 우리와 비슷하거나 혹은 아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앞에 적었듯 우리를 소개하고, 세 자매로 사는 것의 장단점을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