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내 주위의 남자들

2016년 12월 8일

지난 이십 년 가까이 남아공과 영국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의 남자를 접하고 같이 일하면서 나쁜 경험은 정말 드물었다. 팀마다 좋은 동료들이 많고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 내가 참 복이 많다 늘 생각했었다(노파심에 - 저 안 이쁘고요, 어렸을 때부터 유부녀였으니 공대 아름이로 이쁨받은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다 진보 페미니스트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 남편조차도 너 페미니스트냐 하면 아하하 그, 글쎄요 하고 자리 피할 사람이다. 오늘 같이 점심 먹은, 정말 기술력 뛰어나고 똑똑하고 순하고 착한 엔지니어는 죄지은 놈들을 왜 감옥에 두고 돈을 버리냐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냐 (...) 말하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게 아무래도 나은 거 같다는 동료들도 많다. 동구권/러시아 친구들이 많다 보니까 영/미에서 자랐다면 필터 되었을 여혐 발언도 자주 나온다. 이건 꼭 악의를 가지고 여자를 까려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자란 환경의 부산물이다. 뭐 푸틴 지지자도 있고 트럼프 지지자도 있고 그 외 정치적으로 상당히 쇼킹한 친구들 있는데 하나같이 착하고 순하고 똑똑하다.     


그런데 왜 거기서 걔네들과 안 싸우냐고?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성추행을 한다면 다 증인으로 나서줄 이들이기 때문에 난 한 번도 직장 동료를 잠재적 가해자로 볼 일이 없었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일도 없고, 나름대로 최대한 배려를 해주는 편이다.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도, 같이 일하면서 서로 존중하니 싸울 이유가 없다. 일하는 시스템이 셋업 되어 있어서 내가 아파서 하루 쉰다 해도 남자 동료들이 욕할 필요가 없고, 출산 휴가를 가도 이들이 뒤집어쓰지 않아도 된다. 커피는 셀프서비스고 사무실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괜히 희생양 만들어서 커피 타게 하고 청소시킬 필요가 없다. 성추행하는 상사가 없으니 당한 여자 동료 편 들어야 하나 상사 앞에서 입 닫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직이 없고 위험한 환경에서 몸이 힘들 일이 없으니 여자만 빼줘야 할 일도 없다.     

만약 내가 출산 휴가를 가서 이 사람들이 일을 몇 배로 더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밤샘 근무해야 하는데 여자들만 뺐다면 어떨까. 이때 이들이 과연 그냥 신사적인 매너만으로 여자 일까지 다 뒤집어쓸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지금 시스템과 노동환경으로는 자란 환경이 좀 여혐스러웠다 하더라도 서로 존중하고 피해 안 끼치면서 일하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속으로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알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환경이라면, 사람은 다 이기적이니까, 안 그래도 힘든데 내가 더 희생해야 한다 느끼면 쉽게 긴장이 고조되지 않을까.     

극렬 여혐남자들 분명히 있다. 하지만 들이쉬는 공기도, 밟는 땅도, 먹는 밥도 여혐으로 가득찬 나라에서 태어난 이들이 여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정말 힘들다. 그리고 당장 내가 듣고 배운 게 "이게 다 김치녀들 때문이다"라면 내가 조금 힘들 때 사고방식이 그렇게 흘러가기도 쉽다. 출산휴가를 제대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부재가 더 큰 문제이지만 현실로는 나에게 일을 더 하게 하는 여자 동료를 미워하게 된다. 정부와 권력자는 멀고 나보다 더 이득 보는 것 같은,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돈 없다고 나를 거절하는 것 같은 여자는 바로 옆에 있다. 평생 본 게 여성 비하 욕이고 만만한 게 여자며 그렇게 화 풀어도 주위에서 뭐라 안 하니 지하철에서 젊은 여자에게 소리 빽 지르고 침 뱉고 카톡에서 씹는다.   

  

그래서 한국의 시스템이 멀쩡할 수도 있었던 남자들까지 극렬 여혐러로 물들이는 것 같다고 가끔 생각한다. 꼭 서열화해야 하고, 누군가가 막내/약자로 싫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윗사람이 지랄하면 받아야 하고, 그러면서 혹시라도 다른 이가 좀 더 불공평하게 특혜를 받지 않나 눈을 부라리는 사회에서는 집안에서도 어린 여자에게 집안일을 시킴으로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윗사람에게 당한 분노를 아래 만만한 사람에게 풀고,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여자라고 특혜를 받나 신경 곤두세우게 되지 않나 뭐 그런.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 자리를 비울 수 있다'가 받아들여지는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