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누군가 자리를 비울 수 있다'가 받아들여지는 사회

2016년 12월 9일 

"한국이 비교적 괜찮은 출산 휴가 제도를 갖췄음에도 그것이 잘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지 혹시 세부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출산 휴가 제도는 사실 (내가 아는 게 유럽이니까 유럽;;) 의 휴가 문화와도 엮여 있다. 보통 휴가 일주일, 이 주일씩, 더 길게도 내서 훌쩍 떠나고, 그런다고 보스/회사가 난리를 치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 사회 전체가 '누군가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있다'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누가 휴가 중이라서, 혹은 병가라서 빠지면 그냥 일정이 늦춰진다. 그게 불가능한 케이스(선생님들, 간호사 등등)에서는 백업을 늘 두고 항시 대비 중이다. 이건 분산처리 시스템과 비슷한데 (직업병입니다 죄송) '컴퓨터가 고장 안 나게 평소에 관리 잘 한다'가 아니라, '천 대 돌리다 보면 하루에도 몇 대가 고장 날 것이 분명하므로 그걸 감안하고 디자인한다'이다. 그래서 '출산휴가'가 아주 특별하진 않다. 우울증 같은 병가로도 몇 달씩 빠지곤 하니까. 

- 그렇게 일정 관리가 불가능해서 남은 직원들이 더 일해야 하는 경우는, 최소한 내가 다닌 직장에서는, 정확하게 보상이 있다. 주말에 일했으면 그 시간 * 1.5의 시간이 휴가로 주어진다. 주말 하루 일하고 1.5일 휴가 받는 셈이다. 아니면 수당이 빡세게 나온다. 그러므로 주말에 일 시키면 고용주가 손해다. 스타트업이나 개발직에서는 수당 없이 자주 밤늦게,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 있긴 한데, 아주 안 좋게 보기도 하고, 게임 업계 빼고는 고질적으로 그렇게 하는 곳은 못 들어봤다. 

- 사회적 이미지가 있다. "임신한 여자를 해고했다"는 건, "여직원 성추행" 만큼이나 회사의 이미지에 금 간다. 물론 작은 회사에서는 신경 안 쓸지 모르지만 대기업은 정말 신경 많이 쓴다. 돌아왔는데 좌천됐다든지, 아니면 직함이 바뀌었다도 마찬가지다. "구글에서 임신한 여직원을 짤랐다" 이런 소리 쉽게 못 보는 이유다. 

- 동료가 출산이나 병가로 몇 달씩 빠져서 일하기가 힘들어지는 건, 매니저/회사 문제지 직원들 문제가 아니다. 이걸 직원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오너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동료가 빠졌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밤새서 일하고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예외로 의료계가 있긴 한데 (여긴 파업도 힘드니까) 이럴 때 환자들 돌보느라고 좀 더 오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직원이 오너/매니저의 편의를 봐주는 거지,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로 보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 


1) 다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비용'으로 생각하니까 신청하는 사람도 편하고 매니저들도 받아들인다. 

2) 그 사람의 빈자리를 동료들에게 채우라고 부담 지우지 않는다. 지운다면 돈이나 휴가로 보상한다. 이를 고용인도 당연하게 바라고, 고용주도 각오하고 있다. 그러니까 옆 동료가 출산 휴가 간다면 "축하해"이지 "에이썅 내가 뒤집어쓰네"가 아니다. 

3) 출산 휴가를 주는 등의 의무를 피하는 행동을 아주 치사하게 본다. '회사도 먹고 살아야지 여자들 때문에 못 살겠네'라는 식으로 변명하면 신문에 난다. 특히나 이미지에 예민한 대기업들은 아주 조심한다. 

4) 출산휴가를 가지 않는 여자를 영웅시 하거나, 회사에서 더 잘 봐주고 그러진 않는다. 내가 2주 만에 복귀했다고 하면 다 충격과 공포로 반응하지, "와 대단한 워킹맘이다" "여자지만 회사에 충성심 있다"는 식의 반응 없다(이건 미국에서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출산 휴가와 비용에 대한 사회적 동의, 출산 여성을 차별하는 이들이 받는 사회적 비난, 출산 휴가를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는 고용인과 고용주, 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스케줄 조정 혹은 금전/시간적 보장, 출산 여성을 민폐녀로 취급하지 않는 성향 정도인 듯. 물론 복지 잘 된 직장 얘기고, 열악한 곳도 아주 많다. 그리고 어떻게든 차별하고 돈 아끼려는 꼼수 쓰는 사람들 많다. 그저 그것을 보는 사회의 시선이 한국과 다르다 보니 내놓고 못 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은 육아와 가사를 "도와준다”는 사람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