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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남편은 육아와 가사를 "도와준다”는 사람들에게

2016년 12월 10일

육아를 "당연히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라 말하며 “애랑 놀아주기 싫어서” 어린이집에 보내는 전업주부를 욕하고, 남편은 육아와 가사를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정말 싫어하지만, 이건 진짜 애 키워봐야 아는 비밀 중에 하나인데 - 내 새끼 이쁘고 귀엽고 하지만 하루 종일 놀아주기는 노동이다.     


이걸 인정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내 새끼지만 하루 종일 건사하는 것이 기쁨만은 아니라는 것.     

내 가족이고 내 새끼들 돌보는 일이지만 그래도 일이라는 것.     

이걸 인정 안 하면 열정 페이 꼴이 난다. 네가 좋아하는 일인데 돈이 그렇게 중요해??? 좋아하는 일이라면서, 밤샘 몇 번 했다고 벌써 포기야?? 네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게 하는 기회 주겠다는데, 칼퇴근이 중요해?? 이런 질문이 날아오게 된다.     


이 논리는 여자들에게 엄청 써먹는 논리다 (물론 남자들한테 돈 벌어오라고 할 때도). 네 새끼 먹이는 일인데 그게 그렇게 귀찮고 싫어?? 그럴라면 왜 애는 낳았냐?? 뭐 이런 질문들이다. 남자에게는, 남자새끼가 자기 가족 먹여 살리는 게 당연하지, 그걸 그렇게 생색내야겠어?? 로 발현된다.     

비슷한 이론으로 "그따위로 일하려면 왜 취직했냐??" 도 있다.     

애 엄마로서 애 보는 것이 늘 즐겁지 않다는 건 인정 안 해주는 사람들 있어도 직장 일이 늘 즐겁지는 않다는 데엔 사회적인 동의가 있다. 물론 자기 직업이 즐거운 사람도 있지만 백 퍼센트 즐거운 사람은 없다. 이것을 멘탈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직장 있을게 어디냐 닥치고 다녀라 윽박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육아/가사 노동을 열정 페이 식으로, 당연히 네 식구고 네 새끼니까 닥치고 네 할 일 알아서 해라...는 인식이 있는 한은 이것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프레임워크에서 잘 버티는 사람도 있다. 한국 사람들 참 잘 버틴다. 그리고 잘 버티는 사람들은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하거나 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난 직장에서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요구하는 건 호강이라 느끼기 때문에 내 보스에게 내 적성에 맞는 일을 내놔라 요구하지 않고, 신입들이 그런 걸 요구하면 '아이고 참 가지가지 한다'라며 비웃을 때 있었다. 회사 입장에선 나 같은 직원이 더 부리기 쉽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면 변화는 없다.     

직장 일 즐거울 수 있다. 매일매일이 정말 기쁘고 보람찰 수 있다. 그렇지만 거지 같은 직장 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네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 되잖아?” 라는 질문은 불가능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은 내 새끼 돌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기쁘고 전혀 일 같이 안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다. 내가 즐겁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이 아닌 건 아니어서 그렇다. 그리고 내가 즐겁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것도 아니다. 거기에서 제일 도움 안 되는 말은 "그럴 거면 왜 애 낳았어", 혹은 "그따위로 일하려면 관둬".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중요한 다른 이유는.     

호르몬과 화학작용으로 어떤 감정이 생겨난다고 하자. 이건 약을 먹지 않는 이상 개인이 어떻게 바꿀 수 없는 문제다. 무언가를 봤을 때 화가 난다면 화가 난 거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한국식 (혹은 열정 페이) 방식은, "그런 생각하는 네가 잘못됐다!!" 인데, 그렇다고 해서 내 뇌 속의 호르몬과 화학 시스템에 바뀌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극복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인데,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느끼지 마라는 건, 실제 건강에 문제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조언이다. 눈이 나쁘다고?? 좀 실눈 뜨고 보거나 가까이 가면 보이잖아?? 이런 꾀병 같으니라고 등등. 일하는 게 힘들다고? 버텨! 다들 버텨!! 허리 디스크야? 정신력으로 이겨!     


물론 다른 선택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안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극기해서 이겨낸다면 아 뭐 다 좋은데, 그걸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그래서 가사를 “도와준다”는 말이 틀렸다.     

사람의 호의과 양심에 기대는 방식은 효율적인 일 처리 방식이 아니다. 길게 보고 계획하고,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적시하고 일 나누고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방식이, 처음에 일이 많아서 그렇지 몇 배 더 효율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알아서 세금 내라"도 되고 "일 하고 싶은 만큼 일해라"도 통하겠지. 구성원이 호의와 양심으로 넘쳐나고, 페널티가 직접적이고 크다면 실제로 알아서 한다. IT 회사 중에서 무제한으로 휴가 주는 회사가 많은 것이 좋은 예다. 그리고 아이를 보는 부모들의 다른 좋은 예다. 내 새끼고, 내가 안 하면 곧바로 영향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딴 집 애라면 신경 안 쓸 걸 신경 써서 한다.     


이렇게 첫 포인트로 다시 돌아왔는데 -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한다고 해도 일은 일이다. 아 뭐 다들 거의 알아서 하니까 관둬 버리면, 하는 사람은 하고 안 하는 사람은 안 한다. 게다가 안 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시스템이 정립되어 있다면 그 내에서 서로 호의도 보이고 배려도 해 줄 수 있지만, 한쪽이 완전 배째라로 나와 버리면 독박 쓰는 쪽에서는 분할 수밖에 없다.     

웬만한 남자들은 다 취업해서 돈 벌어온다고 하자. 이걸 "당연히 남자니까!" 라고 받아들인다면 여자는 남자가 어떻게 힘들게 돈 벌어야 하는지, 앞으로 20~30년 뭐 먹고 살지 고민하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이때 아무리 약간의 배려와 호의를 보여도 (살림살이를 줄인다던지) 근본적으로 의무를 나누지 않는 이상(맞벌이, 적극적인 재정 관여) 남자의 짐을 덜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걸 "돕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짐을 더는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호의를 보여주겠다" 이다.     


같은 논리로 여자가 육아와 살림을 거의 다 한다고 할 때 남자가 "도와준다"는 것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기획 자체에 대한 의식 없음) 난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호의를 보이는 거니까 너는 고마워해라...가 된다.     


힘든 일, 더러운 일을 여자가 안 한다고 해서 여자가 힘든 일을 기피하는 것처럼 곧잘 말하는데, 전통적으로 육아와 살림을 책임진 여자가 직장을 찾을 때는 육아와 살림을 당연히 나눠서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맡은 업무를 최대한 할 수 있는 한에서 직장을 구하는 이유가 1이고, 여자로서 남초 직장에, 그것도 사람들이 험한 곳에 들어가서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따지자면 미국에서 험하지만 잘 버는 벌목공, 생선잡이 배 선원 등의 직업이 있는데 왜 아시아계 남자들은 거기서 일 안 하고 쉽고 편한 공대 쪽으로만 몰리냐고 할 수 있겠다. 거의 모두가 익숙한 직업,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가능한 직종을 선택할 확률이 크고, 인사과의 협력이나 사회적으로 안전한 분위기가 없는 남초 직종은, 여자에게 실제로 위험하다는 이유도 있다. 글구 솔직히 간호/간병 인력은 완전 여초인데, 치매어른/어린 애들 똥 닦고 이리저리 옮기는 일이 정말 덜 더럽다/덜 힘들다고 생각하나?? 

(애 토하는 거 그대로 받아서 손빨래하고, 똥 묻은 옷도 박박 잘 빠는 1인이 말한다 ㅡ.ㅜ)     


결론.     

1. 몸이나 정신을 써서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일이다. 그게 개인에게 즐거울 수 있고 안 즐거울 수 있지만, 내가 얼마나 즐기냐를 기준으로 다른 이에게 강요 내지 타박하는 건 지양합시다.     


2. 일 x 유닛을 해야 할 때,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주인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옆의 사람이 하는 거 보고, 일을 파악 못 하고, 내 기준의 호의로 내가 도와줄게 넌 고마워해 하면서 생색내는 것을 주인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든지, 집에서 아이를 보든지, 어떤 일이든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뭐가 되어도 된다. 호의를 보이고 도와주는 것이 안 그러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최고의 도움은 일을 실제로 나누는 것이다.     

- 시국이야 어떻든 간에 계속 쓸 겁니다. 언제 우리 차례 오냐고 물어봐도 답 없더라고요. 해일이 어쩌고 조개가 어쩌고. 뭐 어쩌겠습니까. 계속 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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