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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나를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분들에게

2016년 12월 14일

우선, 부르주아로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십 년 전의 저라면 뒤집어지게 웃었겠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위치에 왔네요. 저 사실 꼭 구분하자면 흙수저일 거예요. 공무원 출신 부모님이 남아공에 나오신 이후 저 고딩 때 파산하셔서 고등학교도 학교에 빌어서 장학금 받고 다녔고 스무 살 이후로 집에서 지원 못/안 받았어요. 남편도 흙수저 집안이에요. 스물부터 내 돈 내가 벌어서 살았어요. 첫 연봉이 500만 원이었습니다. 스물하나에 그거 받으려고 새벽 다섯 시부터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출근했어요.     


제가 왜 제가 살지도 않는 한국의 일에 이렇게 열 올리는지 아시나요? 제가 한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을 겪었을지 대강 알기 때문입니다. 

십몇 년 전 양파는 고졸이 마지막 학력인 유부녀였습니다.     

23세의 양파는 고졸 유부녀이지만 취업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아프리카에서 유색인종으로 살던 때의 얘기입니다. 

24세의 양파는 취업한 곳에서 성희롱, 성차별을 겪지 않았습니다. 작업 거는 상사도 없었고 술자리에서 치근덕거리는 동료도 없었습니다. 외모 비하도 없었고 살 빼라 뭐 어째라 고나리질도 없어서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저에게 살쪘다 못생겼다 한 사람들은 전부 한국인입니다. 

25세의 양파는 일하면서도 계속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별거 아닌 이력으로도, 여자로도 이직이 가능했습니다. 

26세의 양파는 결혼 3년 차인데 시댁의 제사 한 번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 아침 한 번 차려준 적이 없었습니다. 명절 상 차린 적도 없네요. 남편이 딱히 엄청나게 훌륭한 성인도 아닙니다. 그냥 보통 남편이에요. 

27세의 양파는 1년 동안 일을 쉬고도 다시 취업이 가능했습니다. 여전히 고졸 유부녀 스펙이었습니다. 

28세의 양파는 중소기업에서 좋은 직장으로 이직이 가능했습니다. 그 누구도 결혼했냐 애는 언제 가질 거냐 묻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학사를 끝냈습니다. 

29세의 양파는 영국으로 취업비자를 낼 수 있었습니다. 비자 신청할 때도 니가 왜 메인 신청자냐, 유부녀가 취업 어떻게 할 거냐 애 낳으면 어쩔 거냐 안 묻더군요. 서른 넘어서 경단녀 되면 어쩔 건지 걱정도 안 하던데요. 

30세의 양파는 아프리카 학사 하나 가지고 이민자 유부녀로 영국 도착 두 주 만에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도 역시 직장에서 성추행 성차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외모 고나리도 역시 한번 없었네요. 영국 떠날 때까지 제사상 한 번 안 차렸고 시댁에 안부 전화 안 드려도 됐습니다. 간병에 호출 된 적도 없고 김장 도우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31세의 양파는 임신 기간 동안 눈치 하나도 안 받고 무려 임금 인상까지 두 번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유급휴가 6개월 받고, 그동안에 석사 공부 엄청 진도 냈습니다. 

32세의 양파는 출산휴가를 무사히 끝내고 복귀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연봉 확 올려서 이직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있는데도 새 직장에서는 안 묻더라고요. 탄력적인 출퇴근 시간 운용이 가능했고 친정/시댁 서포트로 큰 아이 그럭저럭 쉽게 키웠습니다. 

33세의 양파는 또 한 번 연봉 올리면서 마소로 이직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애 있는데 어떻게 일 할 거냐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곧바로 임신했습니다. 그래도 일하기 힘들지 않았습니다. 민폐란 소리 한 번 안 듣고 눈총 한 번 안 받고 진통 올 때까지 일했습니다. 출산 후 돌아와서 연봉 인상 있었습니다. 이때 옥스퍼드 석사 졸업생이 됐네요. 이듬해엔 진급도 했습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똑같은 스펙으로 23세에 한국에서 고졸 유부녀로 시작한 양파는 어땠을까요? 제가 자란 곳에서는 그냥 특별할 것 없는 환경이고 결혼생활이지만 한국에서 제 경험 정도의 운이라면 로또 연속 몇 개 맞은 급입니다.

 23세의 양파는 고졸 유부녀니까 콜 센터 이외엔 취업 안 됐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고졸이니 미쓰양으로 불리면서 커피 탔을 수도 있죠. 

24세의 양파는 퉁퉁하다고 상사에게 구박 받고 그나마 안 이쁘면 노력이라도 하지 화장도 안 하고 안 차려입는다고 동료들에게 지적당하며 스트레스성 병 몇 개 달고 다녔을 수 있습니다(저 열쇠 163에 58킬로 나갔습니다). 

25세의 양파는 심한 야근 때문에 학사 공부를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26세의 양파는 일 년에 있는 몇 번 제사, 설, 추석을 챙기느라 시댁에 드나들고 시댁 어른 간병 때문에 직장에서 눈총받으면서 휴가 냈을 수 있습니다. 

27세의 양파는 아침 한 끼 해달라는 게 그렇게 어렵냐는 남편 때문에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 싹 차리고 출근하느라 훨씬 더 힘들어했을 수 있습니다. 

28세 양파는 학사를 끝내고 드디어 이직을 노리는데 아이는 언제 가지냐는 질문에 어버버 하다가 좋은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29세 양파는, 30세의 양파는, 31세의 양파는, 그러니까 남아공과 영국에서 일하지 않은 양파는 저와 같은 좋은 운빨을 따라갔을지 저는 심히 의심됩니다. 32살에 저는 과연 출산 후 석사 끝내고 복귀해서 아이 키우면서 일이 가능했을까요? 연봉 연상 가능했을까요? 이직 쉬웠을까요? 노오오오력을 죽도록 했으면 다 해결됐을까요?

     

네, 지금 저만 보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공부 잘 하는 학생->명문대->좋은 직장의 정석을 밟고 온 사람이 아니라서 제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못 사는 아프리카에서 파산한 집 자식으로 자라면서도 한국보다 훨씬 더 쉽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페미니즘이고 노동환경입니다. 한국에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사는 20대 친구들 많이 봅니다. 페미니즘이, 성 평등이 자연스러운 환경이라면 정말 성공했을 친구들인데, 저보다 훨씬 더 잘난 친구들인데, 저는 당하지 않았던 여혐을 당하고 저는 겪지 않아도 되었던 차별을 겪고, 엄청난 벽을 마주 서서 좌절합니다. 그리고는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고 질타당합니다. 제가 예뻐서, 잘나서, 독해서 워킹맘으로 사는 게 아닌데,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던 환경이 있는데, 많은 이들은 그냥 결과만 보죠.     


그래서 이렇게 죽어라고 글 올리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이고 뭐고 아무 신경 쓰고 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냥 정상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해서요. 특별한 거 없는 제가 단지 한국을 떠났다는 이유로 로또 급의 운빨을 탄 듯하여 미안해서요. 스펙만 나열하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억대 연봉의 옥스퍼드 출신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제가 아무리 잘났어도 페미니즘 없이 불가능했다고요. 당신의 노오오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더 좋은 노동환경이, 페미니즘이 필요해서 그런 거라고요.    

 

덧: 

이번 해 5월에 제 페이지에 제 소개를 달았습니다. 보시다시피 학벌, 직장 과시성이에요. 저 블로그 시절 때부터 봐온 분들이라면 이거 평소 저답지 않다는 거 아실 거에요. 거슬리는 분들 있는 것도 알아요. 저도 사실 손발 오그라들고 뻘쭘해요.     

제가 딱히 특별한 케이스도 아니고 저보다 훨씬 대단하신 한국 분들도 엄청 많고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팔리는 스펙이라고 하더군요. 여자로는 흔하지 않은 직종이기도 하고요. 그냥 지나칠 말도 명문대 나온 사람이, 특이한 이력에 좋다고 하는 직장 다니는 사람이 하는 말이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고요. 제 글 공유할 때 조금이라도 더 도움 된다고요. 그렇다면 스펙 팔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구마구 팔리라 다짐했습니다.     


제 글이 뭐 특별하진 않지만 한국에서 주위 지인들 있는 데서 페미니즘 관련 얘기 꺼내기 쉽지 않을 때, 알량한 스펙이지만 그래도 신뢰도를 약간이라도 더해서, 약간의 화제성 더해져서 지금까지 수십 년 해 온 아주 당연한 말이 (...) 좀 더 새롭게 먹힌다면, 그렇다면 팔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7개월 대문에 떡하니 달고 지금 글에서처럼 막 뻔뻔하게 팝니다.     

거슬리는 분들께는 사과드립니다. ㅠㅠ     




활중 당했으면 그냥 조용히 글 좀 쉬면서 있으면 되....면 제가 이 모냥 이 꼴로 안 살죠. 글 엄청 썼어요. 왕창 밀렸어요. 도배한다고 욕먹을 거 같아요. 어쨌든. 첫 번째 갑니다. 또 짤릴까 무지 온건함.     

비슷한 내용 전에도 쓴 거 아는데 새로 오신 분들도 있고 해서요. 다시 사과드립니다. 죄송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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