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2일
외국인으로 가득한 팀에 취직했는데 한국 사람은 당신 하나다. 그들은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니까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있다. 보스도 당신을 막 챙겨주려고 한다. 점심시간이 오자 보스가 말한다. "한국 사람 왔으니까 우리 치맥 먹으러 가자!". 당신은 사실 기름진 음식 안 좋아한다. 술도 잘 안 한다. 하지만 분위기 맞춰주는 의미에서 같이 갔다. 보스는 당신을 옆에 앉히고 얼마나 한국 사람이 와서 좋은지, 자기가 치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얘기한다. 뭐 좋은 관심이 나쁜 관심보다는 좋으니까 감사하고 넘어갔다.
그 다음날 점심시간. 보스가 말한다. "오! 넌 오늘도 치맥 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 아니라서 이틀은 무리야!" 이번에도 뭐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다. 동료들이 와서 묻는다. "우리 파스타 먹으러 갈 건데 괜찮아? 한국 사람들 파스타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당신이 젤 잘 먹는 게 파스타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묻는다. 한국 사람 맞느냐고, 오올~ 해댄다. 슬슬 짜증 난다.
쉬는 시간에 동료가 와서 말을 건다. "나도 전에 한국 친구 있었는데!" 하면서 자기 옛날 친구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다. 아니 걔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걔는 강남 살았단다. 당신은 부산 출신이다. 너는 강남 스타일 좋아하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엄청 놀란다. 자기는 '풀고우기'도 좋아한다고 한다. 어쩌라고.
이게 매일같이 계속되면서 점점 짜증이 쌓인다. 당신이 뭔가를 하면 "오 한국 사람은 다 이래?"라고 꼭 묻는 사람이 있다. 미팅에서 말 좀 안 해도 "역시 한국 사람들은 조용하다더니". 마침 내가 맡은 프로젝트라서 좀 더 말이 길어졌더니 "우리 코리안이 오늘은 말이 되게 많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먹다가 보스가 눈을 찡긋하며 묻는다. "너 일본사람들 미워하지?" "네?" "우리 지금 인터뷰하는 사람이 일본 사람인데, 넌 걔가 안 됐으면 좋겠지?" "아니, 그런 거 아닌데요..." "에이, 내가 다 알아. 한국에서 반일 감정 엄청 심하다면서?" "아 그게..."
그렇지. 한국에 반일 감정 있지. 하지만 새로 들어올 사람이 일본 사람이란 걸 반대하고 뭐 그런 건 아니...라는데 아니 왜 니가 나한테 한국의 반일감정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음? 그런 거 아니라고 했더니 괜찮다고, 내가 한국에 대해서 좀 잘 안다고, 나한테는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한국에서 반일 감정 엄청 심하고 식민지 시대가 어땠는지 알고 어쩌고저쩌고 아주 난리 났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아주 청산유수다. 근데요 한국 사람은 저고요, 반일 감정을 알아도 내가 더 잘 알겠지 유투브에서 배운 니가 더 낫겠니?
자. 다들 한국 사람이라고 반겨주고 배려해주고 관심도 가져주고 맞춰주려고 하는데 짜증이 솟구치죠. 나는 그냥 나고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내가 한국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거든요. 내가 뭘 한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피상적으로 아는 한국 사람의 특징이 나에게서 없다고 해서 내가 한국인 아이덴티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요. 글구 제발 나한테 김치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지 마! 니 한국 친구 얘기하지 마!! 다른 애들보다 한국 애라고 엄청 더 챙겨주는데 그거 역차별이니 어쩌니 하지 마!!
마찬가지로. 남초 그룹에서 "오 여자가 왔다 너무 좋다!" "여자 있으니까 분위기 완전히 달라요!" "아 그런데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남자들 좋아하는 음식은 좀 별로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거, 나름 배려라고 하는 건 아는데 당연히 불편하다. 왜냐면 여기서 포인트는 배려가 아니라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내가 오썸 판타스틱 하지 않니? 그것 좀 알아줘 인정해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이해를 부정한다고 해서 여자 아닌 척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람이라고 김치 다 좋아하는 거 아니고 엑소 다 좋아하는 거 아니듯이. 이걸 불편해한다고 프로불편러다, 우린 한국 사람 좋아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 환장.
여자가 왜 공대 안 가냐, 왜 남초 직장 피하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방금 말한 직장처럼 내가 극소수이고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한국 사람 대표가 되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안줏거리가 되고, 늘 가르치려 들고, 그러면서도 나에게 잘 해주고 있다는 것을 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하는 곳으로 가겠어요? 아님 한국계가 꽤 있어서 치맥을 싫어하든 말든 노상관인 곳으로 가시겠어요. 그나마 저기에서는 성희롱, 성추행, 엉뚱한 사람과 엮으려고 하기, 외모 오지랖,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인한 차별은 넣지도 않았습니다.
아. 그리고 맨스플레인. "아니야 여자의 생리는 꾹 참으면 되는 거잖아?" "니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내가 아는 여자가 그랬는데..." 이러면서 여성에 관한 이슈마저도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상대가 여자니까 당연히 나보다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옵빠가 갈챠주께' 하는 상황. 생리 수십 년 해온 내가 더 잘 알겠니 생리대가 얼만지도 모르는 니가 더 잘 알겠니. 내가 아무리 말랑말랑해 보이는 여자지만 그렇게 만만하냐.
생생체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