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5일
누군가의 가치관을 아는 방법...이라고 하면 거창한데,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 때문에 다른 이를 무시하는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칭찬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욕하는지를 알면 쉽다.
내가 아래에 쓴 글에 댓글이 달렸는데 -
그리고 취미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가볍게 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해서 밥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갈아타는 거죠. 항상 기준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이것을 일단 해결하면 나머지는 그냥 재미로 하면 돼요. 너무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이 아닌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직업. 이제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나이도 되셨잖아요.
자, 이걸 읽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나를 모르고, 내가 왜 저 글을 썼는지 모르고 있으나 자신은 이해한다고 믿고 있다. 이 사람 머리에서 나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을 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가볍게 취미로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 먹고 살 정도로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상대방을 잘 모르지만 어쨌든 조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보니 내 직업이 무려 "남들이 우러러보는" 거였소? 오호 좋구려.
댓글 남기면서 악의는 없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사는 게 뭐 한정된 정보로 빨리 판단을 내리기의 연속이다 보니까 나 자신도 제한된 정보로 다른 이를 판단할 테니 뭐 딱히 뭐라 하고 싶진 않고 그래도 마음 써서 조언해주셨으니 기일게 답하자면.
내가 썼던 글의 포인트는 경제 안 좋은 요즘 세상에 생존을 위해서 선택을 하다 보니 호불호는 사치가 된 것 같다는 거였고, 나 역시 좀 심하게 생존 중심 인생 설계하는 사람이라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 같은 질문은 사치였다는 거였다.
20대 초반에 IT 경력 2~3년 되었을 때 삼성에서 현지 채용 제안을 받았다. 내가 그때 다니던 현지 회사는 아무 이름 없는 남아공 중소기업이었고 삼성에서는 월급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훨씬 더 알아줬겠지. 갔냐고? 안 갔죠. 그때 삼성 지사장 분은 좋아 보였지만 그 작은 지사에서 일하는 건 아무리 봐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쌓기보다는 번역· 통역 그외 잡무 처리 고급 사무직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상사 한 명에게 내 커리어를 위탁하는, 매우 피하고 싶은 상황이 된다(시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린 나에게 아이고 이 놈 야무지고 똘똘하구나 칭찬해주고 싶다. 사람한테 내 커리어 맡기지 마세요. 아무도 내 마음 같지 않아요.).
비슷하게 대사관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고사했다. 폼 나고 돈 더 받고 일도 쉽고 다 좋은데, 돌아보면 손해일 것 같더라. 잘 피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개발자들이 정말 잘 안 하는 선택을 했다. QA(테스팅, 품질 관리)로 들어갔다. 주위에 개발자 있으면 물어봐서 알겠지만, 개발자들에게 테스터는 자신의 몇 급 아래로 본다. 실제로 테스트 자동화 QA로 일하면서 "넌 똑똑해서 개발일도 할 만한데 왜 이런 거 해?" 이런 소리 많이 들었다. 왜 하냐고? 수요가 훨씬 높았고, 개발자로서는 탑 20%라면 QA로는 탑 1%가 되고, 그만큼 연봉도 더 셌고 취업도 훨씬 쉽고 이민 가기도 쉽고 등등. 그걸 그저 뽀대 안 난다고 안 해? 내가 왜? 자존심 좀 상한다고? 자존심 챙기면 입금되나?
그걸로 2년 경력 쌓고 영국 왔다. 영국에서도 수요는 많으나 공급 없는 거 알고 택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도착 2주 만에 취업 됐다. 사실 취업할 때도 여러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그때는 2009년. 미국발 경제 위기 때문에 분위기 흉흉할 때였다. 금융 회사, 법률 회사, 도박 회사 등등 선택이 있었는데 도박 회사 갔다. 다 망해도 도박이랑 포르노는 살아남는다는 거 어디서 주워들어서 그랬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그 회사가 제일 낫기도 했다. 세상에서 돈 관리 제일 철저하게 하는 곳이 어딜 것 같은가? 은행 쪽도 있겠지만 카지노들 역시 장난 아니다. 그때만 해도 IT 감사나 보안 쪽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은행에 들어가면 그냥 코드 QA로 갈 수 있지만 신생 도박 회사면 훨씬 더 쉽게 보안 감사 쪽으로 빠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곳으로 갔다. 좋은 선택이었다. 실제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 중에 실시간 트레이딩으로 경험 쌓아서 펀드/은행 쪽으로 많이 갔다.
그다음에 이직하면서 버클리 등의 은행 옵션이 있었고, 게임 회사가 있었다. 게임 회사로 갔다. 월급은 좀 더 낮았지만 선택한 이유? 기술적으로 훨씬 나았다. 은행은 인하우스 기술로 테스팅이었고, 게임 회사는 스타트업이어서 모든 시스템이 아마존에서 돌아갔다. 상용화된 기술, 다른 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기술. 그리고 데이터 쪽 QA로 들어가는 옵션이 있었다. 그 때쯤 분위기를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데이터 붐 불 것 같아서, 혹시라도 QA 열풍 가시면 이것 백업해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거기로 갔다. 그것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돈 더 주고 더 뽀대나는 은행 갔으면 지금은 데이터 안 하고 있겠지.
그 게임 회사 있으면서 데이터 관련 강의 엄청 듣고 아이디어 몇 개 생각해 놨다가 슬슬 다른 곳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냥 QA 계약직으로 뛰면 돈은 훨씬 더 벌었을 거다. 아직도 수요가 훨씬 많거든. 하지만 아직 경력 상해 가면서 돈 뽑을 때는 아닌 것 같고 데이터 쪽으로 좀 더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마소로 왔다. 완전 신생 데이터 플랫폼 팀원 1번으로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마소에 대한 여론은 안 좋았을 때였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그때 구글 마운튼 뷰 서치 인프라 팀에 들어갈 확률 제로라고 보고 테스팅 엔지니어로 들어갈 가능성은 좀 있다고 할 때에, 그것보다는 망하든 어쨌든 신생 데이터 프로젝트 들어가서 몇 년 고생하는 게 더 배울 게 많겠다 싶었다. 이것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2~3년 죽도록 고생하고, 하고 싶었던 데이터 분야 쪽으로 확실히 틀고, 직함까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바꿨다.
언제나 내 선택은 남들에게 조금 더 있어 보이는 것보다는 나에게 이득이 되는 실리 선택이었다. 남들이 좋게 봐주는 직업/ 돈 더 주는 직업을 택했더라면 삼성 현지채용 직원으로 갔을 것이고, 대사관 직원이 되었을 것이고, QA보다는 개발자로 자존심 포기 안 했을 것이고, 도박 회사 보다는 증권 회사 갔을 거고, 게임 회사 QA보다는 은행 계약직 QA 뛰었을 것이고, 마소보다는 좀 더 많이 주고 있어 보이는 곳으로 갔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남들이 부러워 할 것 같은" 자리를 선택하는 대가를 내 인생으로 치렀을 거라 생각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난 인생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아침에 한 시간 치장하면 남들 보기에 좀 더 이뻐 보이겠지만 그런 막막한 이득을 위해 치장하는 건 내 손해인 것 같아서 그냥 대강 후줄근하게 하고 다닌다. 좋은 집 사서 그럴듯하게 해놓고 살기보다는 그냥 그 시간 절약하고 대신 사람들 초대를 안 한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가볍게 해보라고 조언해 주시는데...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나 좋아하는 것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참 좋아했던 것이 글 쓰는 것과 공부하는 것, 언어 배우는 건데, 저 스물 하나에 첫 소설 출판했어요. 그 이후로 이런저런 장르로 열 권 냈습니다(흑역사라 말 잘 안 합니다. 묻지 마세요. 제 책 읽었다고 아는 척하는 사람들 미워합니다. 다들 가슴속에 어린 시절 부끄러운 일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언어는 프랑스어 십 년 배워서 C1까지 했고, 독일어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2년간 배워서 B2 땄어요. 직장 다니면서 계속 IT랑 상관없는 거 공부했고요. IT 빼놓고 다 열심히 했다고 농담하는데 농담 아닙니다. 석사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었는데 그 전까지 제가 택한 과목들은 전공 정외과 관련 과목 외에 온갖 언어들(중국어 스와힐리까지 택했...;;), 통계, 지리, 역사, 이슬람 경제사 (...), 불문학, 영문학, 언어학 뭐 안 가리고 들었습니다. 원래 공부하는 거 좋아해요. 적성은 아니지만 IT에서 살아남은 이유도 공부하는 거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이것저것 계속 코스 듣고 공부해서 그래요. 정말 좋아하는 분야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데 왜 좋아하는 거 안 했냐고 물으신다면 - 지금 하고 있어요. 이렇게 글 쓰고 있잖아요. 바이올린 레슨도 받고, 듀오 링고에서 언어도 배우고, 스카이프 언어 레슨도 받고, 출퇴근하면서 이런 저런 책도 읽고, 운동하면서 freakonomics 팟캐스트 듣고. 좋아하는 거 풀타임으로 해봐 하는 사람들 있는데.
아래에도 썼지만.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는 남자이고 평생을 같이 살고 싶은 남자인데……. 술만 취하면 나를 팬다. 어때요? 정말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인데 도벽이 있다. 이건 괜찮나요. 그냥 적당하게 평범한 사람 만나서 소소한 재미로 사는 것이 오히려 미친 듯이 사랑한 사람과 결혼했다가 그 뒤치다꺼리 하면서 환상이 깨지는 것보다 나을 수 있죠. 직장이 저에게 그렇습니다. 글쓰기 정말 좋아하고 공부하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 내 일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독자/출판사/시장 반응에 내 감정이 널을 뛰어요. 이건 글솜씨가 는다고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연구했다고 무조건 학계에서 성공하는 거 아니죠. 돈 안 받고 쓸 때는 마냥 즐거웠는데, 이백만 원 입금받으면 내가 일이 년을 쏟아부어 쓴 정성이 이백만 원이구나 절망하게 되죠. 프리랜서로 혹시 돈 독촉해 보셨어요? 괜찮은 사람은 괜찮다던데, 저는 첫사랑 남자에게 따귀 맞는 것 같이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었거든요. 내가 사랑했던 추억까지 망치지 마 뭐 그런?
그래서 미친 듯이 사랑하거나 너 없인 못살아 - 이렇진 않지만 내가 잘 하는 만큼 잘 해주고, 소소한 행복 있고, 성실하고 꾸준한 남편(==IT 직장) 만나서 그럭저럭 잘살고 있습니다. 가끔가다가 악 첫사랑이랑 결혼할 것 그랬나 하는(인류학/사학 박사학위 따서 학계 쪽 커리어..?) 후회하긴 하지만요. 원래 첫사랑은 같이 살면서 점점 실망하기보다는 추억 속의 사진 한 장으로 남는 쪽이 낫더라고요.
아니 그럼 책으로/학계 대박으로 돈 많이 벌었으면 그걸 했을까요 물으신다면.
아뇨. 돈이 안 들어와서 절망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내가 휘둘리는 게 싫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 책임져 주지 않는데 그것에 (판매부수, 조회수, 독자 서평에) 내 인생 항로를 확 트는 무한정 신뢰가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그냥 취미로 하니까 좋네요. 글 쓸 때마다 이게 내 최선인지, 댓글수/원고료/인세가 내 능력의 절대적 가치인지, 난 왜 더 잘 못 하는지 묻지 않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매번 씁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남의 시선에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생존에 올인 하기보다 좀 더 있어 보이고, 내 PR도 잘 해서 직급 상이나 대외적으로 좀 더 잘 풀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1인입니다.
답 됐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