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족 상장수여식

by 얀느

아이들이 커갈수록 가족이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먼 곳으로 가족여행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작은 노력으로도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연말에서 연초사이 우리 집에서는 매해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다. 일명 '김가족 상장수여식'라고 불리는 행사다. 가족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일회성 이벤트로 준비했는데 식구들 반응이 좋아 올해로 5년째가 되었다. 가족이 함께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계획하는 시간으로 더없이 좋은 기회라 소개해 본다.


어느 날 TV에서 연말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집에서도 저런 시상식을 열어보면 어떨까 상상한 것이 시작이었다. '연예인들만 고생스러운 한 해를 보낸 것이 아니니, 무사히 일 년을 보낸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상을 주면 어떨까?' 연말에서 연초 사이, 시상식으로 축하할 일을 만들면 한해를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과 함께 선물도 준비해야지. 그렇게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함께 새해 계획을 세워봐도 좋겠다.' 가족이 따라와 줄지 모르지만 혼자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바로 실행에 옮겨 상장을 만들었다. '미리캔버스'에 있는 무료 양식을 찾아 내용을 작성했다. 가족의 한 해를 지켜본 엄마로서 구성원이 어떤 해를 보냈는지 알기에 쓸 수 있었다. 첫 해에 막내에게 주었던 상은 '내년이 훨씬 더 기대된다 상'이었다. 깐깐한 초등선생님을 만나 힘든 한 해를 보냈지만 성실하게 끝까지 임해 자랑스럽다는 문구를 더했다.


첫째에게는 '존재가 감사'상을 주었다. 사춘기의 가운데를 지나던 딸이 무탈하게 보낸 한 해를 고마워하며 종종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아이를 칭찬한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에게 준 상은 '올해 참 수고했다 상', 나를 위한 '애썼다 토닥토닥'상을 준비했다. 힘들었던 한 해 동안 가정의 안팎의 일을 살피느라 애쓴 것에 대한 감사의 상장이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터라 값나가는 상품을 준비하는 것이 부담되었다. 한 사람당 2만 원의 예산으로 실용적인 선물을 준비했다. 아빠를 위한 사무실용 텀블러, 큰아이는 보조배터리, 둘째는 좋아하는 작가의 최신 단행본 만화책, 나는 예쁜 에코백을 사서 포장했다. 상장 만들기부터 선물 고르기까지 혼자 준비하는 번거로움은 있었다. 하지만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식구들이 좋아한다면, 내가 상상한 대로 된다면, 나에게 더 큰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연말과 연초가 걸쳐지는 주말 저녁식사 후 엄마가 준비한 이벤트가 있다며 펼쳐 놓았다. 학창 시절 교장선생님께 직접 상을 받는 것처럼 아빠가 근엄하게 상장을 읽고 아이들에게 선물과 함께 상장수여를 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읽어주었다. 사진으로 남은 상 받는 모습을 보니 하나같이 입이 귀에 걸렸다. 상 문구를 보며 만족스러운 엄지 척을 날리기도 하고, 자신의 문구만 식상하다며 불만을 표출하는 가족도 있었다. 다 같이 선물을 풀어보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기세를 몰아 신년 계획을 위한 질문지를 한 장씩 돌렸다. 각자 편한 곳에서 작성하고 15분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 나누자고 했다. 사춘기 큰 아이는 "엄마, 이것 쫌 오반데?", 남편은 "뭘, 집에서까지 이런 걸 해." 했지만 결국 잘 작성했다. 가족이 작성한 질문지는 잘 보관했다가 다음 해 같은 시간에 다시 쓰인다. 지난해 계획했던 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체크하는데 유용하다.


질문지

1. 나는 어떤 한 해를 보냈나요?

2. 나의 한 해를 #키워드 또는 #문장으로 표현해 보세요.

3.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웠던 점, 보완하고 싶은 점

4.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

5. 한 해를 시작하는 각오


우리는 이 행사를 '김가족 상장수여식'라고 부른다. 처음 상장을 만들 때 이 상을 누가 주는 것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가족의 공통 성인 '김가족 일동'이라고 적어놨다. 막내가 '김가족 행사' 너무 재밌다면서 여러 번 하자고 조르는 통에 행사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원하는대로 해주면 좋겠지만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가 더 귀한 법이기도 하고.


우리 가족은 늘 바쁘다. 어른들은 일하고,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 숙제로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 집안 분위기가 점점 각박해지는 것이 느껴져 마음 한편이 늘 불편했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더해졌다. 하지만 각자의 생활에 몰두해 있는 그 시간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사적인 공간이자, 개인의 성장에 꼭 필요한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위한 희생보다는, 함께 성장하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으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제 더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연말을 빌어 이런 행사를 기획해 본다면 각박한 집안에 훈풍이 부는 듯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는 시간은 덤이다. 일회성 이벤트로 준비했던 이 행사가 계속되어 우리만의 연말행사가 될 줄은 몰랐다. 힘들었던 한 해를 알아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추운 연말 마음 따뜻해지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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