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서로 일하는 학교에 웬만하면 대면하고 싶지 않은 A선생님이 있다.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이 그렇게 쌀쌀맞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말로 나무라듯 알려주는 태도가 영 불편해서 그녀와의 대화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다. 원래 성격이 쌀쌀맞은 것인지, 나에게만 그런 것인지 몰라 더욱 꺼려졌다. 하지만 그 껄끄러움은 나 혼자의 것이었나 보다.
어느 날 A가 환하게 웃으며 도서관에 들어왔다.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생겨 무슨 책이든 좋으니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원하는 분야가 다른데 어떤 책을 추천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 선생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깊다. 기혼자면 연로하신 양쪽 부모님이 계실 수 있고, 아이들이 있다면 공부하고 있거나 사회에 나갔을 것이다. 몇십 년 동안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고군분투했을 A를 머릿속으로 잠깐 그려보다가 책 두 권이 뇌리에 스쳤다.
『옥춘당』,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가 그것이었다. 『옥춘당』은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그림이 많아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 주는 메시지는 묵직한 책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13명의 사망자를 낸 미국 최초의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책으로 두 범인 중 한 명의 엄마가 썼다. A선생님은 호기심을 보이며 두 책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떴다.
3주쯤 지났을까? A는 책을 반납하러 왔다. 두 책 모두 힘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라 힘들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5년간 치매가 있는 시어머니를 집에서 모셨다. 남편분은 지방에 근무하며 주말에만 집에 왔고, 며느리인 선생님이 도맡아 일하며 집안일을 꾸렸다. 매일 이불에 오줌 싸고 냄새난다며 빨래하라고 호통치는 시어머니였다. 선생님은 매일 이불 빨래하며 울었다. 사춘기를 막 시작하던 두 아이도 어둡게 변해갔다.
결국 형제들의 강한 반대에도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불행해지는 것 같아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 속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미세한 아이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던 엄마의 죄책감이, 『옥춘당』에서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향한 손녀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할머니가 집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은 문제없이 잘 클 수 있었을까? 요양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시어머니를 계속 집에 모셔야 했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정답도 없지만 책을 읽으며 지난날을 곰곰이 곱씹다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독서의 치유력이 아닐까. 마음 한 켠에 숨어있던 묵은 감정들이 낚싯바늘에 걸리듯 줄줄이 꿰어 올라와 재조정되고 현실에 맞게 소화되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다.
나 역시 며느리이다. A의 이야기는 곧 닥칠지도 모르는 나의, 우리나라의 모든 아들, 딸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A는 마치 한 개비의 성냥개비처럼 자신을 태워 시어머니를 끝까지 책임지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불태워 주위를 밝히는 단 한 개비의 성냥개비는 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소진하여 모두 타버린 성냥개비는 힘없이 스러질 뿐이다.
돌봄은 기족 공동의 책임이다.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맏이라는 이유로, 가정주부라는 이유로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돌봄을 가족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희생은 또 다른 불행을 낳는다. 세상의 어떤 일도 스스로 굴러가는 법이 없다. 가족의 안녕도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씀으로 가능한 일임을, 집에서 편안하게 먹고 자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가 아님을, 밝던 주위가 어두워지면 어떻게든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의 불빛으로 주변을 밝히기를 바라본다. 까칠한 말투로 다가서기 쉽지 않았던 선생님이었지만 책을 통해서 어느새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좋은 책 추천해 주어 감사하다며 문을 나서는 A의 발걸음이 사뭇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