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곰스크는 어디인가요

by 얀느

2004년 어느 날 TV리모컨을 돌리다가 MBC 베스트극장 단막극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드라마를 시청했다. 1800년대 말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분위기가 나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아내 역의 채정안은 아름다웠고 남편 역은 처음 보는 배우였지만 연기가 좋았다. 그 배우가 엄태웅이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곰스크로 떠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남편과 그와는 상관없이 한 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원하는 아내, 사랑하지만 다른 삶을 꿈꾸는 부부 사이의 긴장감이 극의 중심을 이끌었다. 기대 없이 본 드라마 치고는 생각할 거리가 많고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이었다.


'곰스크는 어떤 곳일까? 드라마 속에 실제 하는 장소였을까? 남자는 결국 곰스크로 떠날 수 있었을까?' 드라마는 끝났지만 곰스크에 대한 생각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하다가, 자려고 누웠다가,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문득 드라마 속 장면이 떠올랐다. 잊어버릴만하면 또 문득, 20년 가까이 지금까지도 말이다. '곰스크로 떠나는 기차'가 왜 자꾸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원작을 찾아보니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단편소설『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프리츠 오르트만, 북인더갭, 2010년 국내에서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은 책이라고 한다.


1992년, 한 대학생이「곰스크로 가는 기차」 독일어 원문을 번역해 대학 과제로 제출했다. 그 원문은 독일어 교수님이 주신 독일 단편이었다. 그 번역본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지며 젊은이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 소설의 여파는 잔잔하면서도 긴 것이었다. 우리는 머리통을 맞대고 제법 진지한 토론에 몰입했다. '곰스크는 과연 무엇일까? 개인의 이루지 못한 작은 꿈일까 아니면 좀 더 원대한 이상일까?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 무엇보다 나 자신의 곰스크는 무엇일까, 나에게 곰스크가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언제 어떻게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결국 뒤풀이자리까지 이어졌고 우리의 불안한 미래와 암울한 현실에 대한 모호한 탄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프리츠 오르트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북인더갭, 2010, 옮긴이 안병률의 말 중 )

소설은 점차 입소문을 타며 연극과 단막극으로도 만들어지고자 했고, 최초 번역자였던 그 대학생(철학박사 안광복)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저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저작권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다.

제작팀은 독일 관련 출판사들과의 사전접촉을 통해 원작자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으나 행방을 찾지 못해 부득이 자막으로 이 사실을 고지합니다. 해당 소설의 원작자 또는 저작권 관련자께서는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북인더갭 출판사에서 '프리츠 오르츠만'의 단편 여덟 개를 묶어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제목으로 2010년 출판하게 된다. 현재까지 저자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저자가 1995년 작고했고, 부인의 주소가 현재 스페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독일에서조차 저자에 대해 깊이 연구된 바가 없다고 하니 그의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독자로서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60페이지도 안 되는 이 작품의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곰스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이루고 싶지만 쉽게 닿지 못하는 이상향에 대한 이상향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본을 접한 젊은이들은 각자의 마음에 곰스크를 품게 되었다. 그들 중 살제로 곰스크를 향해 떠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저 멀리 들리는 것 같은 기적소리에 괜히 마음이 울컥해졌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았던 일들이 내 삶의 팔 할이었기에, 나역시 더욱 곰스크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20대 후반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시기였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마음먹고 외국으로 떠났지만, 부모님 건강 문제로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어떻게든 다시 떠나고 싶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에서 부대끼다보니 어느새 20년이 흘러버렸다. 드라마를 처음 보았을 땐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탔으나 중간에 놓쳐버린 남자의 모습이 어쩌면 내 삶과 닮아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드라마의 장면들이 문득 나를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녹록지 않은 삶에 매몰되어 곰스크를 잊은 사람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여전히 곰스크를 향해 떠나야 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하려고 말이다. 곰스크행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살며시 다가와 드라마의 한 장면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곰스크를 꿈꾼다. 20대에는 냉정한 현실에 내 꿈을 포기한 것이 후회스럽고 분했다. 그러나 40대의 지금은 녹록지 않은 현실의 삶도 곰스크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마을 학교 선생님 자리를 물려주었던 늙은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 역시 젊은 시절, 곰스크로 갈 꿈을 꿨던 사람이이었다.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것을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의미 없는 삶이 아니에요.


누군가 내게 그때 떠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되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매우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또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심성이 곧 나의 운명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시절 이루지 못한 곰스크를 아쉬워하며 살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나만의 새로운 곰스크를 꿈꾸기로 했다.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마음 속에 꿈이 있기에 하루하루가 생생하다. 나는 글을 쓰며 또 다른 곰스크를 향해 나아간다. 언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기꺼이 그 길을 달리고 있다. 내 삶의 곰스크를 향해, 묵묵히, 흔들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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