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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러클양 Nov 24. 2017

로마사를 통해 보는,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

내전 이후. 암살이라는, 실정의 견제책

아마도 역사상 가장 걸출한 정치력을 가졌을 인물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만들어진 원수정 로마의 황제, 이른바 “제관(帝冠) 없는 황제”는 로마에서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가진 존재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즉 아우구스투스에 준하는 정치력이 없다면 유지할 수 없는 지위이기도 했다. 황제라기보다는 예술가에 더 가까운 네로의 자살에서 촉발된 약 2년여의 내전은 도나우 군단과 그들이 지지하는 유대 반란 진압군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종결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수도 로마가 아닌 본토 이탈리아 출신 최초의 황제였는데,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내정을 안정시킨 베스파시아누스 덕분에 로마 시민들은 황제에 대한 생각을 “오직 수도 로마 출신의 고귀한 혈통만이 가능한 지위”에서 “수도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로 그 인식을 바꿀 수 있었고, 이는 나중에 5현제 시기 황제 계승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서민 같은 풍모를 지닌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사를 다룬 BBC 다큐멘터리에서 “네로가 로마네 콩티를 홀짝거리며 오페라를 관람하는 귀족적인 취향이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맥주를 들이키며 축구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는 평민적 취향”*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즉위 이후에도 대중목욕탕을 자주 드나들었고, 자신이 고귀한 척을 하면 원로원이 속으로 비웃을 것이라고 하며 소탈한 풍모를 드러내었다.


네로 재위 기간의 방만한 운영과 내전을 거치며 피폐해진 재정을 복구하고자 공중화장실의 소변에까지 세금을 부과하여 시민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건실한 재정 운용으로 로마는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로마”하면 떠올리는 건축물 중 하나인 콜로세움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도 베스파시아누스 재위 기간이며, 완공된 것은 그 아들인 티투스 황제 때다. 이러한 이유에서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명에서 유래된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다.


포룸 로마눔으로 가는 길 초입에 위치한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주: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으로 있을 때, 네로가 개최한 자신의 자작시 낭송회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발각되어 이탈리아 해안의 한 섬에 유배되어 양봉으로 소일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능력 덕분에 곧 복권되기는 했지만.

**주: 물론 소변세가 공중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공중화장실에서 모인 소변을 수거해서 표백이나 세탁에 쓰는 업자들이 있었는데, 그 업자들에게 사용료를 받은 것이다. 물론,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세금을 내야하는 이상 표백이나 세탁 요금은 상승되었을게 분명하고, 이러한 공공요금(?) 인상에 로마 인민들이 좋은 인상을 가졌을 리 없다. 이러한 사람들의 불만을 아들인 티투스가 전달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앞에서 금화를 보여주며 "소변세로 만든 이 금화에 냄새가 나더냐?"라고 한마디 했고 여기서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황제는 첫째 아들인 티투스다. 티투스는 유대 전쟁 도중 황제가 되어 전장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대 전쟁을 지휘해서 이스라엘 전역을 평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는데, 성경에 나오는 “디도” 황제가 바로 티투스다.*** 기원후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근위대장, 감찰관, 집정관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역임하며 착실하게 황제 수업을 받고, 베스파시아누스 사후 제위를 계승한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티투스 황제.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동일하다.


(***주: 성경에 나오는 로마 관련 인물들의 이름은 교회 라틴어에서 다시 탈격이 이루어져 역사책에 서술되는 이름과 상당히 다른 형태를 지닌다. 카이사르는 "가이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로마 총독인 폰티우스 빌라투스는 "본디오 빌라도"로,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이주시킨 티투스는 "디도"로 서술되는 것이 그 예다.)


티투스의 재위 기간은 기원후 79년부터 81년까지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한데, 40세라는 한창 나이에 황제에 즉위한 티투스가 이처럼 짧은 재위 기간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치세 기간 동안 대재앙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폼페이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 그가 황제에 즉위한지 불과 2개월 뒤에 일어났다. 이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내고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당시 로마에서는 나흘에 걸친 대화재가 일어나는가 하면, 페스트가 유행하는 등 불행한 사건이 계속되었다. 이에 티투스는 즉위 이후 재해대책에 골몰하다가 열병에 걸려 결국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주: 물론 빈정대기 좋아하는 로마인들은 이에 대해 "재위 기간이 짧으면 누구나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빈정댔다고 전해진다. 로마인들의 이런 시니컬함은 아무래도 현재 영국인들이 계승한 듯하다.)

 

구글맵에 나오는 현재의 캄파니아 지방. 고대와 거의 다를바 없다.


결혼을 하지 않은 관계로 제위를 계승할 자식이 없었던 티투스의 뒤를 이은 것은 그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나 형인 티투스와 달리 어릴 때부터 황실에서 자랐지만, 티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제국 통치에 필요한 군사 경험이나 실무 경험을 전혀 쌓지 못한 채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 미비는 결국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보다는 기사 계급을 중용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국 운영에 있어 황제에 자문하는 고유의 역할을 소수 기사계급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이 커지자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만을 가진 원로원 의원을 밀고하고 수사하는 경찰 겸 검찰인 델라토르(Delator) 제도를 운영하여 더 큰 불만을 초래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Titus Flavius Domitianus, 도미티아누스 황제. 서민적인 아버지나 형과 달리 귀족적인 풍모를 보여준다.


도미티아누스의 실책은 내정뿐만 아니라 군사 측면에서도 발생한다.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다키아인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의 영토로 쳐들어오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우여곡절 끝에 그들을 물리친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도미티아누스가 다키아를 완전히 물리치기를 기대했는데, 그 기대와는 반대로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와 강화를 맺고, 이에 더해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된 군단병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돈을 지불하였다. 물론 이 결정은 다키아와 전쟁을 하는 도중에 도나우 강 유역의 다른 야만족들까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양면정쟁을 벌일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고, 이에 더해  포로가 된 군단병을 포기하고 새로 모병을 하는 데 투입되는 비용보다 돈을 지불하고 포로를 돌려받는 데 투입되는 비용이 더 저렴하고 방위선을 재편하는데 시간이 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의 군사적, 경제적 의도와는 달리 다키아와 강화를 맺고 포로를 돌려받으며 돈을 지불했다는 내용이 로마에 알려지자 도미티아누스의 평판은 순식간에 떨어지는데, 로마가 야만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했다는 인식을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정과 군사 양면의 실정으로 누적된 로마 시민의 반발과 원로원의 불만으로 인해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와 두 명의 근위대장, 그리고 그 사후 제위를 계승하는 네르바가 주도한 계획에 의해 암살당한다. 아니, 단순히 암살당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원로원 결의에 의해 그는 “기록말살형(담나티오 메모리아이, 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다. 이 형벌은 모든 공공기록과 공공건축물, 비석에서 관련자의 이름을 삭제해버리는 것으로 ‘공동체(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에 기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여겼던 로마 지도층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다. 이 형벌을 당함으로써 도미티아누스는 오랜 시간 동안 폭군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고,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본격적으로 당대의 금석문이 발굴되시 시작한 이후로 얼마 되지 않는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후계 황제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로마 황제에게 요구된 중요한 역량(혹은 미덕, 비르투, Virtus)은 혈통이나 가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을 군사와 행정 약 측면에서 원활하게 통치하는 능력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건실한 재정 운용, 티투스의 재난 수습은 모두 그들이 젊은 시절부터 제국 군사와 행정의 일선에서 그 과정들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이러한 경험을 쌓지 못한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이후 그 때까지 정체 상태였던 군단병의 봉급을 인상함으로써 군단병들에게는 많은 인기를 받았으나, 내정에 있어 원로원을 파트너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적으로 돌렸고, 군사에 있어 다키아 전쟁을 하며 경제적인 면과 군사적인 면을 잘 고려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시민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결국 암살이라는 견제 수단으로 실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은 호민관 특권으로 인한 거부권과 신체 불가침권은 황제에게 권위와 권력을 더해주었지만, 바로 그 요인으로 인해 원로원이나 군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제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봉쇄시켰고, 이는 결국 로마 제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암살"이 황제에 대한 견제 수단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공포를 공포로 견제하는 악순환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사후 제위는 66세라는 고령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에게 계승된다. 암살이라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잡음 없이 신속하게 제위 계승이 이루어졌지만, 군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했다는 이유로 국경지방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이에 네르바는 군인들을 진정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군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고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제정 로마의 시스템이 가장 원활하게 작동되는 5현제 시대가 드디어 막이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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