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제 1.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네르바에서 시작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종결되는 5현제 시대는 당대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이나 모두 인정하는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로마 제정의 거의 모든 황제들을 혹평하고 독설을 퍼붓는 에드워드 기번조차 이 시대를 일컬어 “만약 누군가에게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부터 콤모두스의 등극 사이의 시기를 고를 것이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렇지만 사실 5현제 시대는 사실 지독한 우연의 연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종의 “사건”이었다. 만약 네르바를 제외한* 트라야누스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까지 제위를 이어받을 친아들이 있었다면, 네르바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의 제위기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네르바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이 후계자를 교육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 5현제 시대는 이루어지지 않거나 2현제나 3현제 정도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황제들은 모두 그들의 역량(Virtus, 비르투)을 선대 황제에게 인정받아 양자로 입양되었고, 제국의 행정과 군사 양 측면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재위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뒤집어 말하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만들어진 원수정 로마의 황제 지위에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은 물론 그 수행을 통해 야기되는 제국의 대내외적 안정이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정치적 역량이 충분했기에-쉽게 말해 정치 만렙이었기에-달성할 수 있었던 여러 권위와 권력의 복합체인 황제위를 후임 황제들의 역량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확립해 버렸고, 이는 로마 황제가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 출중함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아우구스투스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생각해보면, 그가 만든 이러한 로마의 특이한 황제정-원수정이라고도 불리는-체제에서는 5현제 시대가 오히려 예외의 시기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주 : 이어지는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군대에서 인기가 높은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하고 제위에 오른 네르바에게는 설령 친아들이 있다고 해도 군단병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는 인물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친아들을 지명하는 그 순간 암살에 불만을 가진 군단의 반란으로 로마는 또다시 내전의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으로 네르바에게는 친아들이 없었고, 덕분에 군단병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다.
**주 : 앞서 글에서 서술한 바 있지만, 로마의 황제는 지나치게 인기 위주의 정책을 펼쳐서도, 또 지나치게 실리 위주의 정책을 펼쳐서도 유지하기 힘든 자리다. 적정한 수준의 포퓰리즘과 적정한 수준의 실질적 정책,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하는 것이 로마 황제의 책무였고,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5현제의 첫 번째는 도미티아누스 암살후 황제가 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도미티아누스 암살 당시 네르바는 66세의 노인이었고, 변경 지역 주둔 군단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군인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저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96년 9월 18일부터 98년 1월 27일까지 만으로 2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5현제의 첫 번째가 된 것은 아마도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데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외에도 그의 업적은 하나 더 있는데, 다름아닌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기 동안 망가질 대로 망가진 원로원과 황제의 관계를 회복했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은 원로원과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고, 황제 즉위 과정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황제 사후에 후계자가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 황제 근위대) 병영에서 근위대 병사들의 “임페라토르!”라는 외침을 통해 신임 황제로 추대를 받으면 원로원은 그것을 비준하는 역할에 그쳤기 때문이다.*** 반면 네르바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그 즉위 역시 라인 혹은 도나우 군단이나 프라이토리아니의 추대가 아닌 원로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5현제 시대는 다른 시대보다 월등히 황제와 원로원의 사이가 좋았고, 이러한 이유에서 제정 전반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인 타키투스조차 5현제 시기를 “황제의 권력과 시민의 자유가 공존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라 평가한다.
(***주 : 이는 제국 수도 로마의 실질적 무력이 근위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즉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도 근위대가 반발하면 황제 즉위가 어려운 반면, 일단 근위대의 지지를 받으면 그 무력이 두려워서라도 원로원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인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5현제의 두 번째는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바 있는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ianus)다. 히스파니아 속주의 이탈리카 출신인 그는 로마에서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다. 물론 속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탈리카가 기원전 2세기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에 건설한 오래된 식민도시고, 그의 부모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감안하면, 트라야누스 가문은 아마도 이탈리아 태생의 로마 시민권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출신 성분 역시 평민은 아니다. 트라야누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았으며,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집정관과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다만 이것이 놀라운 것은 로마의 파트리키 귀족 출신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서 로마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출신 귀족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로 제위가 이어졌고, 다시 속주 출신인 트라야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것을 통해 적어도 로마 시민들이 명목상으로는 모두 평등하며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열린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실제로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속주 출신 뛰어난 인물들이 중용되었다는 데 있다.
(****주 : 공화정 로마의 최대 위기였던 제2차 포에니 전쟁, 즉 한니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인. 물론 그가 자마 회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쿵크타토르의 지연전술 덕분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불과 스물 다섯의 나이에 아버지와 숙부가 전사하고 그들이 이끌던 군단이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히스파니아 전선의 사령관을 자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 자마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압승을 거두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아프리카누스'는 자마 회전 승리 이후 '아프리카를 평정한 자'라는 의미에서 원로원이 그에게 헌정한 코그노멘이다.
*****주: 시리아 속주 총독은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 총독 및 군사령관 중 서열 1위로, 로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르티아와 전쟁이 발생하거나 혹은 유대 반란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소아시아에 있는 모든 속주 총독과 군사령관은 시리아 속주 총독의 명령 하에 놓인다. 이러한 중책을 담당했다는 것은 트라야누스의 아버지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실력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트라야누스는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군복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고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이 황제 도미티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89년에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하는데, 그가 휘하 군단을 이끌고 고지 게르마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란이 진압된 후였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를 로마까지 호위하는데,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의 능력과 인물됨을 좋게 평가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저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고 네르바가 즉위하게 되고, 그 이듬해인 97년,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에 인기가 높았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암살로 야기된 변경 군단의 불온한 움직임을 해결하기 위해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의 나이 43세 때다.
트라야누스의 업적은 크게 제국의 안전보장과 사회간접자본 건설,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안정보장 측면부터 살펴보자. 황제 즉위 직후 그는 도미티아누스가 추진했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을 재개한다. 다키아 원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성격을 갖는다. 첫째, 도나우 강 중하류 지역의 안전보장이다. 당시 다키아 지역에는 통합된 군기를 쓰는 강력한 국가인 다키아 왕국이 위치하고 있었고, 이 왕국의 군사력은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 군단을 투입한 도미티아누스가 고전할 정도였다. 이 왕국이 더 강력해질 경우 도나우 강 방위선이 뚫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는 제국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협이다. 현재 유럽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라인 강 방어선이 뚫렸을 때 로마까지 이동하는 거리보다 도나우 강 방위선이 뚫렸을 때 로마까지 이동하는 거리가 훨씬 짧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독일 중부에서 로마까지 게르만족이 쇄도하는 것이 라인 강 방어선이 뚫렸을 때의 상황이라면, 크로아티아에서 로마까지 쇄도하는 것이 도나우 강 방위선이 뚫렸을 때의 상황이니 그 위협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는 다키아의 풍부한 금광과 은광이다. 이는 첫째 이유와 연관되어 중요해지는데, 이 풍부한 금광과 은광을 로마가 점령하면 제국을 안정시키는 자원으로 쓸 수 있는 반면에, 다키아가 이것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여기에서 나오는 금과 은으로 주변 게르만족을 포섭해 로마를 침략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트라야누스는 총 병력이 5만 정도인 다키아 원정을 위해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쳐 20만 이상의 군단을 동원하고, 황제 본인이 직접 지휘한다. 101년부터 106년까지 이어진 전쟁을 통해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역을 완전히 복속시키게 되었는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역을 8년에 걸쳐 재패한 이래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제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다키아 원정뿐만 아니라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동방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파르티아 원정도 추진한다. 재위 말기에 추진되었던 파르티아 원정에서 트라야누스는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현재 페르시아 만 지역에까지 진군한다. 물론 이로 인한 보급선의 장기화와 보급기지인 안티오키아의 지진, 그리고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회군하지만,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을 포함해 로마 제국에서 트라야누스가 유일하다.
사회간접자본 건설에서의 업적은 우선 로마 전역에 공공사업 붐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는 현재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트라야누스의 포룸과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비롯해 로마 시내와 제국 전역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으며, 황제의 이러한 솔선수범은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전염되어 제국 전역에 사회간접자본 건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공공사업을 추진한 재원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트라야누스 개인 혹은 각 원로원 의원 개인의 재산이었고, 이러한 막대한 재원이 끊임없이 풀림에 따라 로마 제국 전체의 경기 역시 활황이 되었다. 트라야누스 입장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경기부양 정책이 펼쳐진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보인 이러한 군사적 업적과 공공부문에서의 헌신으로 인해 그와 동시대 로마인들은 트라야누스를 “옵티무스 프린켑스(Optimus Princeps, 지고의 황제)”라 불렀다. 군인으로 시작해 황제가 되었던 만큼 트라야누스의 성격은 실질강건 그 자체였고, 그가 제위에 있으면서 보인 업적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세수를 증진시키고, 다리를 건설하고, 포룸을 짓고, 공중목욕탕을 짓는 등 제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것이었다. 동시대인들로부터도 이런 찬사를 받은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 중 건강이 악화되어 로마로 회군하다가 소아시아 연안의 셀레누스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서거 직전 트라야누스는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
이런 "실질강건" 그 자체였던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그렇지만 5현제 이후 로마가 겪는 혼란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트라야누스의 군사원정이 초래한 결과다. 다키아 정복을 통해 당장 도나우 강 중하류의 위협은 제거했지만, 일종의 힘의 공백상태가 된 다키아 근방 지역은 그들이 견제하던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이 힘을 키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장 5현제의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다가 도나우 강 유역의 주둔지에서 병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파르티아 원정 역시 문제다.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페르시아 만까지 도달하는 등 트라야누스는 그 이전은 물론 그 이후의 로마인 누구도 달성할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지만,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고원지역에서 유래한 파르티아 지배계급의 힘이 약화되고 페르시아 토착민의 세력이 강성해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은 파르티아보다 훨씬 강력한 위협이 된 사산조 페르시아였다. 즉 트라야누스의 군사적 원정은 당대에 한정되어 결과를 보았을 때는 최선의 것이었지만, 시야를 더 후대로 확장할 경우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선택이었다. 전술적으로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로마 제국의 영속성 유지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최악의 선택이 된 것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 제도에서 야기된 내부적 혼란은 아니지만, 그 정치 제도를 통해 제위에 오르고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행사한 트라야누스가 펼친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이러한 위기 역시 로마의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00년 뒤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트라야누스 황제의 정책에 온전히 물을 수는 없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정이 없어도 로마와 반복되는 충돌을 겪으며 게르만족은 로마 군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정 없이도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로마제국 영내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르티아 역시 마찬가지다. 페르시아 같은 중앙집권적 체제가 아니라 일종의 봉건제를 유지했던 파르티아는 중앙정부가 약해질 경우 지방의 세력이 강력해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파르티아는 결국 다른 제국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의 거시적 흐름에서 본다면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역사는 어느정도 경로의존성을 띄고 있고, 트라야누스의 정책이 그 다음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에게,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이 그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트라야누스의 정책은 로마제국의 쇠약과 연결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고의 황제는 절정의 순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산인 팽창된 제국을 유지하는 어렵고 힘든 책무가 하드리아누스의 어깨에 지워졌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힘든 책무를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완벽하게 수행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