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천고일제와 옵티무스 프린켑스
원수정 로마의 전성기를 연 트라야누스 편이 끝났다. 마땅히 이어서 하드리아누스 편을 쓰는 것이 순리이나, 그 이전에 동양과 서양이 가장 대표적인 황제인 청제국의 강희제와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드리아누스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지 아직 제대로 방향을 정하지 못한 탓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오현제 중 세 번째 황제지만, 오현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고, 가장 다재다능한 황제며, 인간적인 매력이 충만한 황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시작을 해야 좋을지 쉽사리 정할 수가 없었다. 트라야누스의 죽음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동안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고민을 하는데, 문득 청제국이 연상되었다. 성조 강희제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 (愛新覺羅 玄燁, 애신각라 현엽) 에서 세종 옹정제 아이신기오로 인전 (愛新覺羅 胤禛, 애신각라 윤진) 을 거쳐 고종 건륭제 아이신기오로 훙리 (愛新覺羅 弘曆, 애신각라 홍력) 로 약 120년 동안 이어진 강옹건성세와 오현제 시대가 유사하며, 그 중에서 특히 강희제와 트라야누스, 옹정제와 하드리아누스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옹정제와 하드리아누스의 유사점은 본 편인 하드리아누스 편에서 제대로 다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강희제와 트라야누스의 유사점을 한 번 살펴보자. 그 전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역사에서 해석은 어차피 끼워맞추기 (ad hoc) 하거나 사후적으로 (a posteriori) 할 수밖에 없고, 특히 아마추어인 내 입장에서 쓰는 이 글 역시 사후적인 끼워맞추기 성향이 강하게 나타남을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강희제와 트라야누스의 첫째 공통점은 그들에게 붙는 호칭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야 당연한 것이고, 그 뛰어닌 업적으로 인해 강희제는 천고일제 (千古一帝) -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 - 라는 경칭으로, 트라야누스는 옵티무스 프린켑스 (Optimus Princeps) - 지고의 황제 - 라는 경칭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경칭이야 어차피 사후적으로 사람들이 붙이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황제가 모두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 좀처럼 보기 힘든 훌륭한 황제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두 황제 모두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확장했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로마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확장한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강희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국이 분열될 수도 있었던 삼번의 난*이라는 위기를 극복한 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아무르 강 이북부터 외흥한령 이남을 제국 영토로 확정지었으며, 대만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 티베트를 정복하고 준가르부**를 복속시킴으로써 현재 우리가 보는 중국 영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제국의 영역으로 확정지었다. 이처럼 트라야누스와 강희제는 제국의 판도를 최대한으로 확대했다는 측면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주: 청제국은 중국을 차지하면서, 그 과정에서 협조한 한족 장군 셋, 즉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를 각각 번왕으로 봉했다. 오삼계는 운남의 평서왕, 경중명은 복건의 정남왕, 그리고 상가희는 광주의 평남왕이 되었다. 이들은 중앙에서 먼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청제국으로서는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에 철번을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오삼계, 경정충 (경중명의 아들), 상지신 (상가희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삼번의 난이다. 이 반란은 1673년부터 1681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이어지나 강희제의 승리로 끝난다
**주: 준가르부는 몽골의 한 갈래인 오이라트 계열 유목민족들이 세운 제국으로 "최후의 유목제국"으로 불리며 청제국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현재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카스피해, 그리고 외몽골과 티베트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제국이다. 이들은 강희제 때 청의 세력범위에 복속되나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건륭제 때 제노사이드 수준의 말살을 당한다.
***주: 청제국의 발원지는 이 제도에서 흰색으로 빗금쳐진 "Manchuria"다. 분홍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중국을 정복하기 이전인 후금 시절의 영토고, 베이지색으로 칠해진 만리장성 이남 영역이 명제국 멸망 이후 청제국이 차지한 영토다. 이 베이지색에서 흰색 빗금쳐진 부분이 삼번의 난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외몽골, 준가르부, 타림분지, 티벳, 그리고 타이완 섬을 포함하는 짙은 녹색 부분이 강희제가 정복한 지역으로 그가 얼마나 넓은 영토를 정복했는지 알 수 있다.)
셋째, 사회간접자본 사업이다. 트라야누스의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강희제의 사회간접자본은 트라야누스의 그것과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강희제가 확충한 사회간접자본은 법 및 제도의 확립과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족을 우대하는 한편 명 태조 홍무제의 능에 참배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죄인들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사형 집행을 최소화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강희제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은 문화사업으로, 현대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 강희자전****이 이 때 간행되었다. 도로나 공공건물 뿐만 아니라 법제도와 교육문화 역시 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측면에서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두 황제는 모두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주: 강희자전은 강희제의 칙명에 의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1711년에 시작해 1716년에 편찬된 한자사전이다. 이후 모든 한자사전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전이다.)
마지막 넷째 공통점은 후계자 선정에 있어 의혹이다. 강희제는 총애하던 황태자를 반역 음모로 숙청한 이후 따로 황태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에 제일황자 인티의 황일자당, 제사황자 인전의 황사자당, 그리고 제팔황자 인쓰의 황팔자당 등이 암투를 벌이게 된다. 결국 강희제 사후 제사황자 인전을 후계자로 임명하는 유조가 반포되지만, 이는 이후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 모습은 트라야누스도 마찬가지다. 트라야누스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고,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하드리아누스와 다른 측근들을 경쟁시키는 구도를 채택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유서를 통해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하지만, 살아있을 당시 단 한 번도 하드리아누스를 명시적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이 역시 하드리아누스를 총애한 황후 플로티나와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 격인 근위대장 아티아누스가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원인이 된다.******
(*****주: 이를 둘러싼 의혹을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가 한국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는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이다.
******주: 이 모습은 프랑스의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작품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 정말 잘 묘사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다룬 많은 소설 중에서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한국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두 권짜리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번역도 정말 훌륭하다.)
이처럼 유사한 모습이 많았던 두 황제를 계승한 후계자들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후세 사람들에게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제국의 확장 이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안정을 가져온 명군"이 그 것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통쾌한 확장은 끝났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지만 그것만큼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제국의 안녕과 유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수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참고하면 좋은 책>
조너선 스펜서 저, 이준갑 역, 강희제, 이산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저, 곽광수 역,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