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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Nov 23. 2022

나의 눈부신 역사를 위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나는 이 극을 중학생 때 처음 알고 난 후 기대에 가득 차 오랜 시간 빠른 시일 내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5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설레는 마음을 안고 관람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나는 무대로 쏟아지는 다양한 문학 작품의 메타포와 인용구에 완전히 썰렸다. 영어영문학과 친구들에게 추천하면 수업 자료로 제법 유용할 것만 같은 극이라는 생각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닌 다른 관객들에게도 <히스토리 보이즈>의 첫 관람은 이랬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극은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생각해보는 동시에, 한 인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에 대해서도 고민거리를 끊임없이 던진다. 그 점에서 느끼는 점이 매번 달라져 마니아층이 두터운 극이다.  


2020년 커튼콜


<히스토리 보이즈>는 12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텍스트를 지니고 무대를 빈틈없이 채운다.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모인 특별반 아이들은 기존 헥터 선생의 수업 방식에 익숙해 있지만 곧내 등장하는 어윈 선생으로 새로운 교육관을 맛본다. 그 어느 교육 방식이 맞다고 쉽게 재단할 수 없을만큼 두 선생의 교육 방식은 극과 극을 달린다. 이 극을 관통하는 가장 큰 논제는 '예술과 역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예술과 역사를 특정 목적을 지닌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다. 전자에 동의한다면 헥터, 후자라면 어윈이다. 이 극은 180분간 상충하는 위 두 교육 가치관 모두 얼마나 매력적인지 풀어낸다. 그 과정 속에서 학생들, 심지어 그들을 인도하는 교사들까지 여러 차례 방황을 통해 성장하고 관객들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재고해보게 된다.





헥터 선생에 관하여


 2년 전에도 나는 <히스토리 보이즈>를 재밌게 보았으나 이 흥미가 결코 극의 완성도와 직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헥터 선생의 고유한 교육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헥터가 저지른 성범죄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이후, 지극히 주관적으로 어윈의 시선에 머무르며 관람하곤 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치는 결코 그가 학생들에게 저지른 부조리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리고 학생들은 헥터로부터 당한 치욕적인 일을 '그저 그 시절의 일'로 남겨둔 채 담백한 어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아직까지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가끔 의문이 든다.


1980년대라는 시대를 감안하여 보수적이고 엄격한 옥스브릿지 학교에서 일어나는 극적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유대인이며 셰필드에 머무르고 키가 작은 데이비드 포스너는 같은 반 데이킨을 짝사랑한다는 점에서, 동성애자로 자신이 “완전히 좆되었음”을 어윈에게 어필한다. (어필, 이라는 단어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일종의 동정심 유발이자 전략이었다.)

(2) 이성애자인 데이킨은 새로 온 선생 어윈에게 흥미를 느끼며 뒤틀린 사제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3) 상스러운 언행을 일삼고 종종 여성인 린톳의 의견을 가벼이 무시하는 학생들, 그리고 어린 이 친구들을 성추행한 헥터, 그러나 그들의 관계에는 계속해서 문제가 없이 친근하다.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으로 헥터의 가르침을 새기며 졸업한다는 것. (도대체 뭘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바라본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 부조리함을 다루기 위해 탄생한 극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불편함을 직면하는 것도 우리가 느껴야만 하는 감상이 아닌가 싶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적일 수 있겠지만 헥터가 문학으로 이 세대에 알리고자 했던 가치는 의미있기에 학생들이 ‘교육’이 아닌 ‘교양’으로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포스너가 헥터 선생 앞에 토마스 하디의 <북 치는 소년 핫지> 시를 읊조리는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시와 언어를 통해 헥터와 포스너 간의 연대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포스너는 처음에 데이킨이 '흥미'를 느끼는 어윈에게 그 동지 의식을 느끼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헥터 선생에게서 묻어나는 슬픔을 닦게 된다. 그 동시에 헥터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되려 징계로 인해 은퇴를 통보받은 사실에 통탄해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둘은 자신이 왜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건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이때 포스너가 읊조리는 시가 바로 앞서 말한 <북 치는 소년 핫지>다.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다가 구덩이 속에 시신으로 버려지는 핫지의 삶이 담겨있다. 비참히 세상을 떠났어도, 이름만은 남아 반짝이는 별이 된 핫지는 포근하게 포스너의 손을 잡아준다. 포스너는 헥터에게 이 시를 쓴 토마스 하디의 삶이 어땠는지 묻는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서글픈 삶이었지만, 인정은 받았지. (중략) 그는 무언가를 공유하지 않는 느낌, 무리에서 빠져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라고. 포스너가 핫지의 이야기에서 자신을 발견했듯, 헥터는 토마스 하디의 삶에서 자신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만난 적도 없고 이미 오래 전 죽은 사람의 글 속에서 나의 관점을 관통하는 생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책 속에서 손이 나와 내 손을 잡아준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말에 묵묵히 헥터에게 손을 내미는 포스너. 이 장면은 하디가 담아낸 핫지를 그려내듯 관객에게 큰 정서적인 울림을 준다.


 극이 내려갈 때 즈음, 헥터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먼 훗날 누군가에게 반드시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넘겨줘라. 때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받아서 느껴보고, 넘겨주는거지. 날 위해서도 아니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곳 누군가에게 어느 날 넘겨주는거다 얘들아. 나는 너희가 바로 그 게임을 배우길 바랐다. 넘겨줘라.


 고통에도 성적이 주어진다면 1등급을 받아냈을 포스너가 헥터에게 손을 건넸을 때 즈음부터, 그는 이미 문학과 그의 교육에 진정성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로 헥터의 이야기를 유유히 들어주는  “넘겨주는” 행위를 실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동시에 문득 드는 생각은 역시나 불편함이다. 헥터의 좋지 못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심장으로 가르친 교육관이 괜찮았으며, 이가 포스너에게 오랜 위안으로 남았다는 점만으로 평생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누군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최악의 사람으로 남고 또 누군가에겐 그 가치를 마음으로 새기며 살아가는 힘을 준 은사로 남는다는 것. 현실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고자 한 것이 연출가의 의도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윈 선생의 수업은?


나중에 어윈이 유명한 역사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소의 반대쪽에 앉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에요. 기정 사실화된 역사적 사건을 놓고, 그 반대를 증명해 보였던 겁니다. 논지를 찾고, 그걸 뒤집고, 그다음에 증명할 근거를 찾는다. 그게 바로 어윈의 테크닉이었어요. 그건 중세시대 학자들만큼이나 철저히 공식에 따른 것이었어요.


 어윈 선생은 수업 시간 동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다른 관점으로 제시한다. 신선한 논리는 곧 입시의 '전략'이 된다. 논지를 뒤집어 수업하는 어윈을 보다 보면 모든 관객은 그 새로움에 빠져든다. 그렇다면 마치 대치동 1타 강사같은 모습의 어윈은 이성적이고, 냉철하다고 볼 수 있는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실패한 경험 아래 진정한 역사의 본질보다 자극적인 저널리즘을 좇는다. 과연 아이들을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 보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 업적으로 실패한 과거를 가리기 위해서인 이유가 없진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헥터와는 다른 결의 빈틈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라.


 헥터와 어윈 선생이 공동으로 수업하는 홀로코스트 씬은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어윈 선생을 따라 역사를 일종의 수단으로 접근해 논지를 짓는 데이킨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가족을 잃은 포스너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둘의 의견이 극에 치달하는 장면은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문득 이 날엔 홀로코스트가 아닌 일제강점기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포스너와 같이 소수자의 입장으로서 우리의 역사의 논지가 뒤집힌다면? 기어코 포스너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중립적 태도로 임한 그를 칭찬한 대학 면접관이 잔인하다.




덧붙임. 극을 나열했을 때

보이는 시대의 흐름

 

 헥터가 '사랑의 매'라며 아이들을 때릴 때마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가 떠오른다. 그 극의 시대적 배경은 <히스토리 보이즈>보다 60년 정도의 세월을 앞서고 있다. <어나더 컨트리> 학생들이 다니는 영국의 기숙학교 '개스코인'에서는 한 학생이 체벌로 매를 맞는 일이 생기면,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침묵을 지킨다. 오로지 체벌이 무서워 교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살아간다. 극 <어나더 컨트리> 내 가이 베넷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채찍으로 매를 맞는다. 몇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히스토리 보이즈> 속 영국의 어느 명문대 특별반에서는 체벌이 가해져도 이에 대해 확실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 보기 좋았다. 헥터 선생이 '동성애'를 '또라이'라고 표현한다는 점과, 아무리 목적을 가진 대화였다고 해도 나이가 지긋한 헥터가 아닌 젊은 어윈 선생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는 포스너를 보며 같은 극 내에서도 시대의 대비가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추신, 리현 포스너가 2년 사이에 많이 강해졌다. 데이킨을 바라보는 눈빛에 독기가 아주 가득하다. 불안을 덜고 질투를 담아낸 노선이 눈에 보였다.


결국은 예술이 이기게 되어있다!


 옥스브릿지 특별반 학생들이 모두 행복하길, 학업에 얽매여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길 바라며 다음 시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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