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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Nov 20. 2022

녹내장과 어학당

진득한 것

 日記를 읽기 전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두 가지 사실을 사전에 고지한다.


(1) 나는 올해 가을, 안압의 상승으로 시신경이 짓눌리는 실명 질환 개방각녹내장을 진단받았고

(2) 휴학을 한 뒤 해외 대학교에서 주관하는 터키어를 온라인 수업을 매일 듣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들이라 자세한 이야기를 추후에 더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녹내장과 터키어 공부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내 곁에서 진득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지금 기록하려는 이 날은, 처방받은 약이 떨어져 대학병원 안센터로 향했던 부지런한 하루다. 이제는 안센터 내에서 쉴 틈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전공의 선생님들의 낯이 익다. 하물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로 늘 북적이는 이곳에 홀로 앉아있을 때엔 덜컥 외로움도 느낀다. 앞으로 나는 몇 번을 더 와야 이 묘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렇게 약을 처방받고 곧장 어학당 수업을 들었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고 이에 대한 짧은 담소를 나누는 것이 수업의 시작이다. 나는 안과에서 막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부를 전했다. 안과, 녹내장, 대학병원 등등 이 모든 단어들을 조합해 터키어로 말해야 함을 직감했지만, 하루 일과 중 제법 묵직한 일이었기에 빼놓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게 역시나 왜 안과를 다녀왔냐고 물었다.


우선 녹내장이라는 단어를 터키어로 찾아냈지만, 선생님과 나머지 외국인 학생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니 이야기를 꺼낸 이상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이 질병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고민했다. 아는 단어를 쏟아놓고 최대한 조합해서 말하고자 했다. 그렇게 내가 뱉은 첫마디는 터키어로 ”제 눈에 있는 신경들이 천천히 죽어가요.“ 였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 시간이 나로 인해 느려지는 것이 싫어 웃음을 겸비한 이런저런 비언어적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간단하게 다듬어 다소 자극적으로 남은 내 질병을, 서툰 터키어로 뜨문뜨문 전하고자 하니 그리 된 셈이다.


 부족한 실력으로 무언가를 표현해야 할 때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을 쉽게 놓칠 때가 많다. 의사는 복잡한 의학 용어도 쉽게 풀어서 환자에게 전달하고, 어학당 선생님도 어려운 터키어를 늘 쉬운 ‘터키어’로 설명하는데 나는 이 둘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의도는 잘 전달이 되었는지, 다행히도 돌아오는 답변에는 진심어린 걱정과 위로가 묻어났다.


  우리는 외국어로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입과 귀를 열기 전 한 차례 신중해진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국어가 대화를 다시 짚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상대의 말을 더 깊게 곱씹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게 된다. 그것이 바로 회화의 매력이자 소통의 시작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어학 공부가 즐겁다. 서툴더라도 계속해서 배움을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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