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23일 월요일
소나기 뒤 흐림, 차차 개고 있음
기록자 : 야림
보통의 방학과는 달랐다. 하루에 기본적으로 약속을 '최소' 두 개 쯤은 잡고 아침부터 밤까지 불나방처럼 밖을 쏘다니던 나의 일정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약속이 하루에 두 개가 아니라, 일주일에 두 개 쯤으로 줄어든 적도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의 방학을 망치러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8월부터 9월까지가 여름방학이고,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약 2주간 연말연시 기간 동안 겨울방학, 1월 말부터 신학기가 시작되는 4월 초까지는 봄방학이다. 특히나 봄방학은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간만에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넉넉해 여행까지도 계획할 수 있는, 내게는 정말 더없이 소중한 방학이다. 특히 이번 방학은 졸업작품을 만들기 전 조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방학이 될 것이란 생각에 유럽여행도 계획해둔 터였다. 그 계획은 당연히 물거품이 되었고 여행 계획 뿐 아니라 서울행 자체가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만 가득했다. 그래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코로나시대 속 서울생활의 작은 희망이었다.
꼭! 그렇게 기어코! 밖으로 나가겠다면 집에서 놀고 있는 차를 가지고 나가라는 아빠의 명이 있었다.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을 이용하면 타인과의 접촉양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 이용가능한 차만 있다면 따라야 마땅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3월 5일, 재택근무 중인 ㅇㅇ언니를 만나고자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나 맛좋다는 그녀의 동네 돈까스도 맛볼 겸 두런두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위함이었다. 무사히 그녀의 집 앞에 차를 대고 짧은 집구경 후 돈까스 집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타느니 간만에 바람도 쐴 겸 걸어서 가는 게 좋을까 싶어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꼈다. 걸어서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지만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이야기가 넘쳐 흘렀고 금세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다.
언니는 전문가답게 토핑(?)으로 얹어 먹을 수 있는 고추를 사장님께 청했다. 내어주시면서 "이거 어떻게 먹는 지 알아요?"라며 웃으시는 사장님을 보니, '분명 이건 단골만 아는 비밀의 토핑이다.'싶어 괜히 나까지 으쓱해졌다. 산뜻한 초록빛의 고추를 고명 삼아 한입가득 입에 담은 돈까스의 맛은.. 일본의 돈카츠와는 또 다른 매력의 맛이었다. 아름다운 돈까스와 커피를 앞에 두고 한참 수다방구를 털어내고는 한껏 무거워진 배를 껴안고 다시 운전을 해 집으로 돌아왔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기분전환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한국에 와있는 학교 친구들 여기저기서 카톡이 날아왔다.
'요미우리신문에서는 한국인 입국을 금지한다는 기사를 냈다더라, 언니 언제 돌아갈거야?ㅠㅠ'
'입국할 때 심사를 강화한대!'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우리? 어떡하지 상황을 더 봐야하나?'
'저녁에 아베가 공식 발표를 한다니까 그거 일단 봐보자.'
카톡이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그만큼 마음도 같이 무거워지고 심난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난 오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왔는데, 더 이상 돈까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뉴스에 아베 얼굴이 나오기를 이렇게 기다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아베 얼굴이 지나고 나니 화면에는 "일본, 한국 입국자 전원 2주 격리 방침" 이라는 헤드라인이 걸렸다.
일본 전국의 공항을 폐쇄, 오로지 입국자는 도쿄 나리타공항과 간사이 오사카공항으로만 입국하라는 내용도 함께 흘러나왔다. 시행일은 3월 9일 월요일부터. 원래대로라면 나는 3월 25일에 돌아가려고 했다. 학교 선배들의 졸업전시도 모두 취소되어 일찍이 돌아갈 이유도 없어진 나는 차라리 조금 잠잠해지면 돌아가 조금 집안청소도 하고 곧 있을 개강을 준비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8일 이후에는 모두가 어딘가 알지도 못하는 시설*에 격리되어 2주간 시간을 보내야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설에서 감염이 안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오히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 '알 수 없음', 서울에서의 공포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 정체를 숨기고 내 앞에 섰다. 계획한 시기에 돌아가려는 그 계획마저 또 어그러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는 딱히 탄탄한 계획 하에 발언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지정하는 시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거주지가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거주지에서, 관광객인 경우는 머무를 숙박시설에서 알아서 격리를 하라는 이야기다. 또한, 입국과 동시에 한국/중국에서 사람은 국적과 상관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으니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알아서 이동하라고 했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가족 모두가 얼른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9일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당장 내일 돌아가는 표로 돌아가자 결정했다. 몇 번의 오류 끝에 다행히 표가 내 손에 들어왔고 그 길로 나는 급히 짐을 쌌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몸이 차가워지고 덩달아 손과 목소리도 덜덜 떨렸다. 많지 않지만 몇개 잡아둔 약속들이 있었다. 그 길로 그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급히 내일 돌아가게 되었다며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냥 이 모든 게 너무 황당하고 두려웠다. 정확한 형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이를 어느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일본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이른바, 관광비자의 면제자격을 중단했고, 그 직후 한국은 방한 중인 일본인에 대한 모든 비자를 취하했다. 그리고 한국-일본을 잇는 하늘길은 대부분 끊어졌다).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는 전화를 수 차례 돌리고 나니 짐가방도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다. 여기서 받은 선물이나 채 다 읽지 못한 책 따위를 넣다보니 비어있던 가방이 터질듯이 꽉 차버렸고, 수화물 규정을 초과해버리는 무게가 아닐까 잠시 걱정이 됐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얼추 나도 안정을 되찾았다. 여권이니 지갑이니 중요한 것들도 모두 잘 챙겼다. 이제 잠자리에 들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길로 공항이다.
누워서 깜깜해진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사실, 꽤 답답했다'고.
2년 전, 그러니까 2018년 3월 26일부로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그것도 일본에서. 서른 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취를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해도 가족의 (좋고 나쁨을 떠난) 취향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4인가족의 아파트살이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취향으로 가득 메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그것이 '야림하우스'와의 첫 연이다. 그리고 올해 1월 살면서 처음으로 재계약이라는 것을 했다. 2년을 다 채우고 다시 야림하우스에서 2년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고작 2년을 채워 혼자 산 것 뿐인데, 20년을 넘게 같이 산 가족과 같이 있는 집이 답답하고 불편하고, 더 이상 내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 말도 안되고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2년인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상하고 이해가 안되는 한편,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인 것을.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전날 갑자기 출국을 결정하게 되다니... 답답하고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할지라도...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끝없이 돌고 도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답답함에 심난함까지 더해졌다.
어찌저찌 잠을 청했고, 가족들과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김포공항은 붐비지 않았고 심사도 전혀 엄격하지가 않았다. 다만 수속 과정에서 마스크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1인당 30장을 초과하면 압수되고 기내로만 가져갈 수 있는데 지금 몇개를 갖고 가느냐는 것이었다.
30장이라니, 너무 호화롭다. 내게는 그마저도 부모님이 쓰셔야할 것을 몇 개 빼어내 10장도 채 안되는 마스크만이 캐리어에 있었고, 그걸 빼어 기내로 가져가는 가방에 구겨 넣었다. 항공사에서는 최대한 기내에서 멀찍이 승객을 앉혔다. 내가 탄 열에는 총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자리지만, 행마다 한 명씩 총 세 명이 앉게 됐다. 대부분이 마스크를 끼고 조용하게 기내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후일, 간당간당하게 마지막날 돌아온 친구는 닭장처럼 닭처럼 승객으로 꽉 찬 비행기에 올라 탔으며, 주변사람들이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기침이나 재채기를 해대는 탓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온몸을 씻고 소독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트위터를 통해 뜨문뜨문 접한 소문들 중에는
'일본에 휴지가 없다, 생리대가 없다, 하물며 쌀도 올려두는 족족 다 팔린다더라.'
'좀처럼 훔치는 일은 하지 않는 일본에서 공중화장실 휴지가 없어진다더라'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치 괴담처럼 모두가 말이 달라서 어떤 게 진실인지 보기 전까지는 어떠한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끌러두고 곧장 집 앞 마트로 향했다.
다행히 두루마리 휴지가 있다. 다만 두툼하고 질이 좋은 것들은 다 나가고, 그에 비해 조금 질이 낮은 제품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날만 그랬지 수일간은 정말 이 선반의 휴지 전체가 동이 났었다. (이 글을 쓰는 3월 23일, 이제는 많은 이들이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사재기를 멈췄고 두루마리 휴지는 여느 때와 같이 가득채워져 있다.) 다만 생리대는 여전히 일인당 한 개만 구매할 수 있도록 수량제한이 걸려 있었고 이는 현재시점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 전세계에 재난이 일어난 지금과 같은 시국에 왜 여성만이 어려움을 겪어야하는 것일까 또 한 번 화가 났다(그럼과 동시에 '면생리대'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다).
돌아온 지 어느덧 2주를 훌쩍 넘겼다. 이제는 사재기가 멈췄고 휴지도 생리대도 쌀도 다 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마스크다. 일본은 한국보다 마스크를 구하기가 어렵다. 국가 차원에서 마스크를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각자가 알아서 눈에 띌 때마다 구입해야하는데 걸음이 느린 나는 편의점이나 마트나 약국에 들르는 족족 마스크의 꼬다리도 보지 못했다. 출국하기 전에 아마존에서 마스크를 주문해두었지만 배송이 계속 지연되고 있어 대체 언제 도착할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크로 연명하고 있지만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마스크가 없어도 괜찮을까.
일본은 예전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사고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코로나에 감염이 되면, 방역을 잘 하지 못한 정부의 탓이 아니라 걸린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전세계가 판데믹의 상황에 놓여있어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님에도 이 국가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책임을 져야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나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집에 있으니 '계획'이라는 게 얼마나 무용한지 여실히 깨닫는다. '이맘 때에는 이런 걸하고, 이 때에는 이런 걸 해야지.'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어그러지거나 깡그리 다 날아갔다. 간만에 들른 서울을 만끽하면서 친구들과 수다방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사라졌고, 마스크 없이는 밖으로 나설 수 없는 비일상적인 일상을 보내게 되었고, 함께 숟가락 담궈가며 먹던 밥상 앞에는 개인 그릇이 놓이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악수를 하고 애정을 담아 꽉 껴안던 사랑스러운 표현들은 기피 1순위의 행동이 되었다. 꿈에 그리던 유럽여행은 계획도 짜보기 전에 눈앞에서 사라졌고, 선배들의 졸업전시를 가려던 일정도 다이어리에서 지워졌다. 심지어 입국 일정도 정부의 발표에 의해 간단하게 어그러졌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은 우리를 놀리기라도 하듯 어그러지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는 계획을 하고 상상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 막막한 상황에서 나 자신의 안위만큼은 절대로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다.
모두가 각자의 건강을 살피고 안녕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