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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림 Mar 30. 2020

내가 있을 곳은 이 방바닥 위

2020년 3월 30일 월요일

날씨 : 흐림

기록자 : 야림



한국의 의료진들이 마스크와 방역복의 무게에 눌려 피부가 쓸리도록 방역에 힘쓸 때, 나는 더 이상 뉴스를 확인할 의욕도 없이 하시모토 땅바닥을 딛고 있는 내 발만 쳐다봤다. 올림픽이 가까스로 연기가 되었고 이를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건지) 일본 각지에서 확진자가 생겨났다. 특히 도쿄는 며칠만에 수십 명이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또 한번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다시 사재기가 시작됐다. 사재기는 하루이틀 사이 금방 안정됐지만, 도쿄에서는 외출자제령이 내려진 탓에 3월 28일과 29일 주말간 대형몰, 백화점,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대부분 긴급하게 임시휴업문을 써붙이고 가게문을 닫아야했다.


이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함께 의지하고 있는 친구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검사도 잘 안해주고 개강도 또 늦춰질지도 모르는데, 이 나라에 있느니 일단 난 한국에 돌아갈래."


때마침 나는 1차 심사를 통과해 최종결과만 기다리던 장학금이 있었는데 똑 떨어져 침울해 있었고, 친구의 말은 내 불안감에 불을 붙이는 결정적 한마디가 되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집에만 있으니 안 좋은 생각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윽고 모든 불안함이 손 붙잡고 나타나 한몸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작업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장학금도 떨어진 내가 심지어 이런 작업으로 졸전*을 해야한다고?'

'학교 작업실에도 못 들어가는데 다른 작업을 구상해봐야하는 걸까?'

'차라리 휴학을..?'

'학업을 접고 그냥 한국에 돌아가 일을 해야할까, 뭘 할 수 있을까 나따위가...'

'난 잘 하는 게 아무것도 없나봐. 이 나이 먹도록 뭘 한거지.'


... 코로나바이러스가 내 방학을 망친 것도 모자라, 자존감까지 떨구고 있었다.



*일본의 한 미술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있는 나는 대학원 수료를 위해 내년 3월 졸업전시를 열어야한다.



침침한 곳에서 실타래를 풀었던 나날들이여 안녕


런던의 뽈이 그만의 사정으로 어두운 동굴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그녀는 정말 힘을 내고 있고 각자의 속도가 있음을 나는 안다), 나는 며칠간 동굴이 아니라 침대 위에 꽈당 앉아 잔뜩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면서 지냈던 것 같다. 풀자니 속 터지고 그냥 가위로 다 잘라버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소중한 실타래를 손에 들고 목과 허리를 한껏 구부린채 말이다. 다행인 건, 나는 그 실타래를 모두 푸는데 성공했고 다시 동그랗게 잘 뭉쳐두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임과 동시에 너무나 쉽게 그 생각이란 것에 지배 당하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안 될 이유부터 찾거나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안좋은 일을 걱정하는 일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방바닥에 앉아 실마리를 풀어나가며 깨달은 것은, 생각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몸을 일으켜 움직이자는 것이다.




그래, 여기서 좋은 하루를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이곳에서 하자고.


이제는 더 이상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이 바이러스를 핑계삼아 한국으로 도망갈 궁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집은 오로지 하시모토에 있는 주방과 방 한 칸이 분리된, 바로 이곳이다. 그 방 한 칸이 작업실 겸, 거실 겸, 침실이지만 내가 편히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사랑스러운 나만의 섬이다. 그러니 여기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부지런히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일 것이다.


이번 주부터는 집안 구조를 조금 바꾸고 적극적으로 작업할 환경을 만들어 그 안에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개강을 기다리며 작업을 하려고 한다. 아마 다음 편에는 불쑥 야림이 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나 야림하우스의 모습이 슬쩍? 혹은 대놓고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생존일기 겸 교환일기로 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에게 동기부여할 작업일기로서도 이 일기장을 활용하려고 하다니, 나는 다분히도 욕심쟁이구나. 그래도 이 일기장이 있으니 행방불명된 내 자존감이 금방 나의 집으로 찾아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大切なこと 소중한 것,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내게 위기의 모습을 하고 섰다. 하지만 위기는 때로 역전의 기회로 작용한다는 말을 믿어보려고 한다. 쥐고 있던 것을 모두 놓아주고 0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볼 때다.


동그라미는 '이렇게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는 계획의 중단이나 수정을 실패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지금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있고, 이에 오기를 부리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중심에 그것을 두고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려고 한다.






마지막은 야림의 드로잉 이미지로 장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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