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림 Apr 14. 2020

생각버스가 내게 준 기회

중학교 때부터 특수학교를 다닌 나는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까지 전부 미술 전공으로 진학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마침내 미대에(까지) 진학 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는 그리는 사람은 될 수 없겠다'라고. 실기실에 들어가면 각자의 자리에서 앞다투어 물감을 개고,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늘 느꼈다, 여기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기왕 변명하는 김에 더 말하자면, 그냥 나는 자신이 없었다. 재능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길로 나는 계속 딴짓을 했다. 딴짓의 일환으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생각버스 프로젝트>였다. 생각버스는 나와 Y가 함께 만든 프로젝트다. Y와 나는 고교 동창으로, 전공은 다르지만(Y는 시각디자인, 나는 서양화전공) 같은 대학으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는 수업도 따로 듣고 사는 지역도 달라 거의 대화할 기회가 없었지만, 대학에 와서 공강일 때나 수업이 끝난 후 자주 함께 학교 앞에서 매운 닭갈비 아니면 깔루아빙수를 먹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버린 이곳, 내게는 죽을 때까지 이곳은 MMMG로 기억될 거다

 

처음에는 그냥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무슨 과제를 하고 있는지, 블로그에 어떤 글을 올릴지(당시 Y는 꽤 인기가 많은 디자인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들. 그러다가 진로와 같은 사뭇 깊지만 답없는 이야기로 이어지거나, 고민을 털어놓는다거나 했다. 그 당시 나는 직접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두루뭉술한 포부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은 적이 많았다. 무슨 일을 하고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내가 경영을 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거다. 당시엔 아직 안국역에 MMMG 카페가 자리하고 있을 때로, 우리는 곧잘 그곳을 아지트 삼아 만났다.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Y의 디자인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런 팬심을 담아 무슨 일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디자인을 꼭 너에게 맡기고 싶다고 MMMG 카페 2층 창가가 바라보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 차라리 같이 뭔가를 만들어보면 어때? 



그러다 문득 함께 편집물을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Y로부터의 제안을 받았다. 마침 둘 다 디자인 중에서도 시각디자인, 혹은 편집디자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특히나 <Hello, 가로수길*>이라고 하는 무가지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아 신간 소식에 대해 업데이트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Hello, 가로수길>과 같은 종이물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뭐를 주제로 하지..?" 


우연히 서로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 관심있는 게 무얼까 이야기하다가 '버스'라는단어가 돌연 Y의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가만 생각해보면 둘다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학생들이었다. 나는 2호선을 타면 갈아타지 않고 올 수 있음에도 '지하'로 다니는 게 싫어서, 굳이 환승을 해가면서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그 또한 경기권에 살면서 빨간 광역버스로 학교를 오가니 하루 24시간 중 꽤 많은 시간을 버스 안에서 보내는 사람 중 하나였다. 버스를 소재로 하는 독립출판물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동시에 직전에 다녀온 런던에서 탔던 빨간 2층버스가 떠올랐다. 런던의 2층버스, 뉴욕의 I♥︎NY와 같이 도시의 심상이 되어줄 서울의 4색 버스. 그렇게 생각버스는 우리의 마음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Hello, 가로수길>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져온 프로젝트다. 가로수길에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무가지 <Hello, 가로수길>을 시작으로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이야기들을 다양한 문화행사로 풀어냈다. 










누구와 약속한 것도 아닌데 꾸준히 어기지 않고 두달에 한 번씩 발행했다.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취재하고 열심히 접어서 열심히 배포했다. 차츰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고 팬이라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마켓에 참여하면 자신이 타는 버스에 애착을 갖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생겼다.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도 당했다. 강연 요청도 받고, 출간 제의도 받았다. 대학시절을 생각버스로 꽉 채웠다고 해도 모자랄 만큼, 대학생활은 곧 생각버스 그 자체였다. 나의 대학시절과 20대 중반까지의 삶을 만들어준 소중한 보석, 생각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소중한 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생각버스는 내게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생각버스가 완숙할 수록, 나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버스 프로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