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토탈 리콜’(렌 와이즈먼 감독, 2012)은 필립 K. 딕의 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원작으로 한 폴 버호벤 감독의 동명의 SF 걸작을 리메이크했는데 내용은 가벼워졌지만 첨단 기술에 힘입어 비주얼과 재미는 확장되었다. 21세기 말. 화학 전쟁 탓에 브리튼 연방과 소도시 콜로니만 살 만한 환경이다.
마티아스를 수장으로 한 테러 집단은 하우저라는 뛰어난 인물까지 영입해 날로 세력을 키우고, 코하겐 연방 수상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로봇 경찰을 대거 증원하려고 많은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로봇 공장 노동자 더그(콜린 패럴)는 비밀 요원 로리(케이트 베킨세일)와 결혼해 콜로니에서 살고 있다.
콜로니의 노동자들은 폴이라는 공간 이동 장치를 통해 연방으로 출근한다. 더그는 매일 같은 꿈을 꾸고, 동료에 의해 리콜이라는 곳을 소개받는다. 이곳은 조작된 기억을 주입해 주는 비인가 병원. 리콜에서 새 기억을 주입하려 하는데 갑자기 의사가 더그에게 비밀 요원이라며 의료 행위를 중단한다.
그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총을 난사하고, 홀로 살아남은 더그는 10여 명의 경찰들을 제압하고 탈출해 집으로 간다. 그가 로리에게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털어놓자 갑자기 그녀가 공격한다. 로리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와 달아나던 더그를 멜리나(제시카 비엘)가 구해준다.
더그는 원래 비밀 요원 하우저였다. 코하겐이 마티아스를 잡기 위해 테러 조직에 위장 잠입시켰으나 멜리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진실을 깨닫고 코하겐을 배신했다. 코하겐이 잡아들여 기억을 조작했고, 로리를 감시원으로 붙였던 것. 그러나 직장 동료가 나타나 멜리나가 거짓이라고 설득하는데.
버호벤의 ‘토탈 리콜’은 당시(1990)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비주얼을 선사했지만 지금 보면 많이 촌스럽다. 그럼에도 결론이 꿈인지, 생시인지, 조작인지, 현실인지 논란일 만큼 감독의 연출은 매우 영리하게 의도적이다. 이 작품은 대놓고 상업적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기에 그런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그런 명증함이 재미를 줄지는 몰라도 원작만큼의 깊이까지는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다. 어쨌든 원작의 주제인 호접몽론(장자)에 대한 의식만큼은 확고하게 잇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된 후 깨어나 ‘지금의 내가 진짜인가, 꿈속의 나비가 진짜인가?’라는 상념에 빠졌다.
그보다 앞서 플라톤은 침대와 동굴을 비유로 펼친 이데아론을 통해 세상은 미메시스(모방, 재현)라고 경고했다. 많은 우매한 사람들이 동굴에 갇힌 걸 모르는 채 뒤에서 비친 빛이 만들어 낸, 눈앞의 벽에 형성된 그림자를 사실로 착각하고 있다고. 우리가 아는 세상은 펜로즈의 계단(왜곡의 역설)이 아닐까?
굳이 종교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많은 무신론자들조차 사후 세계를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흔히 ‘먼저 가서 기다려. 나도 곧 갈게.’라고 기도하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게 그 증거이다. 그러나 사후 세계의 존재가 증명된 바는 없다.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조차 신뢰를 잃어 가는 터.
간단명료한 재미와 비주얼에 치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가진, 하우저의 이중 첩자라는 정체성은 그대로 가져오는 영민함을 보인다. 연방은 인구 폭발로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하다. 코하겐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콜로니 주민들을 쓸어버리고 일부 연방 주민들을 이주시켜 여론을 잠재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티아스의 테러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이다. 로봇 경찰의 증원은 그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디서 많이 보아 온 그림이 아닌가! 코하겐은 “넌 네가 이중 첩자인지 몰라?”라고 묻고, 하우저는 “전에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는 잘 안다.”라고 응수한다.
“진정한 자아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현재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라는 대사는 매우 현실적인 인식론을 보여 준다. 세상만사와 세상 만물은 변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본 남산과 죽기 전에 보는 남산은 변함없지만 지구가 탄생하던 46억 년 전에는 다른 모습이었을 게 확실하다.
또한 우주 역시 138억 년 전에는 지금과 다른 구성이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숱한 별들이 생멸을 거듭했을 터이니. 그래서 많은 사상가들은 ‘오늘을 충실하게.’라고 외치고는 한다. 과거의 하우저가 독재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것보다 현재의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게 더욱 중요하다.
플라톤은 ‘동굴에서 뛰쳐나와!’라고 외쳤고 베이컨은 ‘동굴의 우상’(개인적 편견)을 경고했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서 깨우쳤다. 그러나 결국 플라톤은 기억과 이성을, 니체는 생성과 망각을 설파한 것이다. 사람은 매일 기억을 쌓고 추억을 회상하면서도 많은 기억을 망각하면서 살아간다.
콜로니 거리는 중국어, 러시아어, 한국어 문자들이 넘실대고 풍광은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감독, 1982)를 연상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블레이드 러너’ 역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다. 그만큼 스콧이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적, 철학적 감독이었다는 증거.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인셉션’ 등과 함께 감상하면 매우 유익할 듯하다. 물론 그 작품들의 우수성에 따라갈 수준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 ‘생활세계’는 선험적 개념인가, 경험적 의식인가? 본유 관념으로 의식하는가, 외래 관념으로 인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