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자’,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

by 유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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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ybacchus@naver.com] ‘초능력자’(김민석 감독, 2010)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양립하는 한국형 히어로 영화다. 1991년. 한쪽에 의족을 한 소년이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정해 스스로 죽게 만든다. 그런 괴물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엄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차마 끝내지 못하고, 소년은 도망간다.


2010년. 규남(고수)은 폐차장에서 터키인 알, 가나인 버바 등 두 동생과 함께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내다가 교통사고로 입원함으로써 해고된다. 중상이었지만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한 그는 유토피아라는 전당포에 취업해 대리라는 직함을 받는다. 동생들이 전당포에 찾아온 날 초인(강동원)이 등장한다.


그는 전당포에 있던 사장 정식(변희봉), 그의 딸 영숙(정은채), 두 동생 등의 마음을 조정해 돈을 빼앗으려 하다가 규남에게 초능력이 안 통하는 데 기함한다. 그는 네 사람을 통해 규남을 제압하려 하지만 규남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그 과정에서 정식을 죽인다. 복수심에 불탄 규남은 초인을 잡으러 나선다.


초인에게 조종당한 많은 사람들을 물리친 끝에 초인을 붙잡은 규남은 그를 경찰에 넘기지만 경찰은 초인에게 총을 빼앗긴 뒤 두 사람을 경찰 총기 탈취범으로 특정해 전국에 수배령을 내린다. 규남은 초인에게 조종당하지 않도록 동생들에게 보안경을 착용케 해 싸우지만 역공을 당해 두 동생을 잃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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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21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데에는 강동원과 고수라는 두 미남 배우의 역할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잘생긴 강동원의 광기 어린 연기 솜씨는 썩 봐 줄 만하고, 막노동을 하는 고수가 조금 어색할 법도 하지만 강동원과의 조합이자 갈등 구조이기에 어느새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초인은 눈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를 조종하는 초능력자이고, 규남은 남다른 부상 회복력 등이 뛰어난 육체적 초능력자이다.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고 종합하려 한 칸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즉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다. 한쪽 다리를 잃은 초인은 육체적으로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자이다.


하지만 그는 눈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의 집에는 화려한 건물 모형과 그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피규어가 있다. 자신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규남은 배운 것도, 내세울 만한 기술도 없는 극빈자이다. 전당포에서 대리 명함을 받았다고 열심히 일해서 과장 승진을 꿈꿀 만큼 소박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달리는 트럭에 치이고도 안 죽고 금세 회복한다. 심지어 지하철 역사 안에서 초인의 공격에 숨이 멎었다가도 소생한다. 초인과 규남은 각각 관념론과 유물론이 대상화된 인물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람들은 각종 선전물과 미디어에 의해 세뇌되고 조정되어 온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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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독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이념 대립 양상이 첨예한 우리나라 국민들이 언제부터 그리 사상에 관심이 많았을까? 이는 더욱 막강해진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포퓰리즘, 그리고 그걸 이용해 사세를 확장하려는 미디어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보수주의자 중 보수주의가 뭔지 잘 모르는 이가 수두룩한 게 그 증거.


초인은 바로 그런 ‘조종하는 세력’이고, 그에 세뇌되어 규남을 공격하는 대중은 바로 다수의 현존재자들이다. 규남의 집요함에 초인은 진저리친다. 규남이 초인을 잡고자 하는 이유는 죄 없는 정식을 죽였기 때문이다. 정식은 자신을 인정하고 채용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정과 정의 때문이다.


관념론은 관념을 실재와 물질보다 우선시한다. 관념은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견해와 관점이다. 이 인식론적 문제가 올바른 이성에서 출발할 때에 비로소 도리와 정의에 근접하기 마련이다. 초인의 아버지는 무능했고, 폭력적이었다. 그런 최악에 환경에 태어났지만 초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초능력이 있다.


만약 초인이 관념을 바꿔 자신의 초능력을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썼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폭력을 밥 먹듯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 태어나게 한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비뚤어진 욕망밖에는 없었다. 그럴수록 자신처럼 결핍에 옹송그리는 소외된 사람들의 결핍을 해소시켜 주는 데 그 능력을 썼다면 더욱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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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규남이라는 데서 감독이 성향적으로 유물론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규남은 육체적 고난이 커질수록 더욱더 강해진다.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식의 복수를 하겠다고, 단죄를 하겠다고 무모하게 덤빈다. 처음 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던진다.


규남을 다치게 만들고, 아이들을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트럭과 지하철은 경쟁만이 강요되는 삭막한 이 사회와 분주하게 돌아가는 그 시스템을 의미한다. 조금 천천히 간다고 목적하는 바를 못 이루는 건 아닌데 조직과 시스템은 ‘빨리빨리’를 강요한다. 사람은 사람일 따름인데 슈퍼맨을 요구한다.


결국 이 영화가 주장하는 건 잘못된 관념론, 즉 정치, 사회적 프로파간다의 폐해다. 초인과 규남의 대립은 세상의 균형을 말한다. 신이 공평할 수도, 우주 자체가 운명론이나 기계론의 근거 하에 탄생하고 이어지며 소멸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식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묻고 규남은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초인은 규남에게 “너만 조종 안 되면 이상하잖아.”라며 공격한다. 이는 독재자를 비롯한 기득권자의 위압과 자만을 뜻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신=자연’이다. 장 자크 루소는 자연회귀를 주창했다. ‘규남처럼 그냥 순리 혹은 신의 섭리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안 되냐?’라고 이 영화는 묻는다. 규남의 유토피아는 소박한 현실이지만 초인의 유토피아는 허상이다.


*사족; 규남이 마지막에 총을 맞고 건물 옥상에서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생존해 반신불수가 된 후 결정적인 순간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시퀀스는 속편을 연상케 하는데 11년이 지난 건 이 시나리오가 그리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강동원+고수 조합만으로도 가치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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