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영화 ‘가려진 시간’(엄태화 감독, 2016)은 늦은 오후 서쪽으로 넘어 가는 해를 등진 한 소녀의 앞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안으로 소년의 공이 굴러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렇게 수린(신은수)의 마음속으로 성민(이효제)의 존재가 들어왔고, 성민의 인생 속에 수린의 사랑이 자리잡게 된다.
수린은 2년 전 어머니의 재혼으로 지금의 계부 오도균(김희원)을 만나 1년을 살다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후 최근 계부와 함께 외딴섬 화노도로 이사 온 초등학교 6학년생이고, 도균은 터널 발파 공사 현장 책임자이다. 수린은 새로운 환경의 낯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계부가 엄마를 죽게 만들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굣길에 한적한 도로에서 계부의 차를 보고 피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민을 만난 그녀는 조금씩 환경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민과 그의 친구 태식(엄태구) 등과 어울려 모처럼 행복이라는 걸 배워 가기 시작한다. 수린과 성민은 숲속 외진 곳의 한 폐가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들만의 추억을 쌓고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 삼는다.
추억과 사랑은 눈에서 시작되어 공간이 차원을 열고, 그렇게 에피소드를 쌓는 가운데 그리움이 영속성을 보장했다면 두 사람은 최소한 완벽했다. 첫 만남에서 “너, 고아니?”라고 물었던 수린은 자신도 고아임을 성민에게 털어놓는다. 성민은 비누공예로 수린을 향한 남다른 감정을 표현한다.
그렇게 험난한 세상에서 소외됐던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가슴에 품으면서 애정 혹은 우정을 초월한 영혼적 교감과 신뢰로 소통하게 된다. 성민은 수린에게 비누 공예로 감정을 표현하고, 수린은 성민에게 입을 맞추며 “배신하면 죽일 거야.”라고 말한다. 그 죽임은 사실 죽음이다.
그렇게 어울리던 소년, 소녀들은 발파를 직접 보기 위해 공사 현장으로 숨어들었다가 우연히 깊은 동굴을 발견한다. 그 속에서 전설 속의 ‘요괴 알’을 발견하고 성민이 갖고 나온다. 동네 어른들의 구전에 의하면 시간을 먹는 요괴가 있는데 그 요괴를 부르는 의식인 ‘손님 접대’를 하면 시간이 멈춘다는 것.
아이들의 의견이 분분한 사이 수린은 어머니의 유품인 머리핀을 동굴 안에 두고 온 것을 깨닫고 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지만 밖에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의 실종에 마을이 발칵 뒤집히고 주민 중 유일한 이방인인 수린과 도균이 의심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 폐쇄적인 태도를 보인 수린에게 주술적 차원의 부정적 시각을 보내는가 하면 도균이 발파 작업으로 인한 사고를 고의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는다. 성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그리움에 사무치던 수린은 갑자기 한 20대 청년이 나타나 자신이 성민(강동원)이라고 주장하자 두려움에 도망간다.
그러나 그가 남긴 노트가 자신과 함께 썼던 그들만의 일기장이었고, 그 안에 자신이 만든 그림 문자로 성민이 그동안의 사연을 적었음을 확인한 수린은 성민을 믿게 된다. 그러나 뭍으로부터 급파된 수사팀장 백기(권해효)는 이 사건을 파헤칠수록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의문의 청년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확신을 갖고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사이 청년이 확실한 성민이라고 믿게 된 수린은 그의 도피 행각을 돕고, 언론은 한 소아 성애자가 한 소녀를 공상 허언증 혹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뜨렸다고 여론을 몰고 가는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집의 아이들’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연상되는 판타지 동화로서 유사한 국내 판타지 멜로 중 단연 돋보이는 아이디어와 감각, 그리고 훌륭한 상상력의 아름다운 영상 등이 즐비한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요괴 알이나 비누 공예, 머리핀 분실 등 다소 작위적인 소품과 설정이 살짝 거슬리고, 129분의 러닝 타임이 다소 지루하긴 하지만 시간이란 소재 하나로 이런 성숙한 동화를 쓰고, 그것을 ‘엑스맨’ 같은 재치의 비주얼로 엮어 낼 수 있다는 상상의 나래는 높게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감독은 이 영화를 2015년 10월에 크랭크인했으니 ‘엑스맨’을 참고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미스 페레그린’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는 못 보고 만들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될 듯하다. ‘손님 대접’의 시간 정지 의식을 하면 세상은 느낄 수 없을 만큼 찰나의 시간만 정지하지만 당사자들은 최소한 십여 년은 멈춘 시간 속에서 나이를 먹어야 한다. 제목대로 소재가 시간이라면 주제는 소통과 믿음이다.
화노도 주민들은 겉으로는 평온해보이지만 그 누구도, 특히 이방인은 절대 믿지 못한다. 성민의 친구 재욱의 아버지는 멀쩡히 아내가 있지만 오토바이 뒷자리에 ‘티켓녀’를 태우고 다닌다. 보육원장은 원생들에게 말로는 자신이 엄마라고 하면서 정작 급성장한 성민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무작정 벽부터 쌓고 본다.
친엄마라면 그랬을까? 세상에 넘쳐나는 가식과 거짓을 의미한다. 더불어 신화와 동화를 믿지 못하는 어른들에 대한 조롱이다. 모두 소통과 신뢰의 부족이다. 궁지에 몰린 성민은 수린에게 말한다. “괜찮아, 너만 내가 성민인 걸 알아주면 돼.”라고. 반면 도균은 수린을 남다르게 아낀다면서도 그녀의 호소와 절규를 다른 세계의 언어로 받아들일 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집안에 감금한다.
계부인 도균은 어쩌면 대화할 줄 모른 채 자신만의 아집으로 군림하려 하는 지도층일지도 모른다. ‘난 너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라며 집단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려 나가려는 ‘보호자(리더)’가 얼마나 위험한지 은근히 암시한다.
엄태구의 동생인 엄 감독은 강동원의 영화 중 그를 가장 아름답게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카메라에 곱게 잘 담았다. 300대1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수린 역을 따낸 신은수는 지난해 드라마 ‘도도솔솔라라솔’로써 안방극장에서의 주연 배우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