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자객 섭은낭’(허우샤오시엔 감독, 2015)은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감독상을 안겨 준 예술 영화이다. 무협 영화가 아니다. 8세기 중엽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하던 시절. 번진(절도사를 최고 권력자로 한 일종의 지방자치단체)의 힘이 번성했는데 위박 절도사 전계안(장첸)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는 조정의 가성 공주가 위박으로 시집온 뒤 들인 양자. 일찍이 정혼녀로 섭은낭(수치)이 있었지만 가성 공주는 위박의 미래를 위해 권세가였던 전 씨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키고, 은낭은 제 쌍둥이 동생인 여도사 가신 공주에게 보낸다. 은낭은 도가에 빠진 여도사 밑에서 13년 동안 자객으로 길러진다.
여도사는 부패를 이유로 조정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은낭을 통해 제거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은낭은 스스로 임무를 포기한다. 제거 대상의 아이가 귀엽다는 게 그 이유. 그러자 여도사는 무예는 뛰어나지만 마음이 여린 은낭을 단련시키고, 조정의 안위도 지키기 위해 계안을 암살하라고 지시한다.
은낭의 엄마와 여도사가 자매지간이니 계안은 사촌이기도 하다. 계안은 정략결혼으로 자식까지 낳았지만 애첩 호희에게 빠져 있다. 그날도 호희의 방에 있는데 은낭이 나타난다. 계안과 은낭은 결투를 벌이지만 계안은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은낭은 그를 해치지 않고, 옥결을 남기고 사라진다.
옥결은 선황이었던 쌍둥이 자매의 오빠가 그녀들에게 물려준 것. 자매는 계안과 은낭이 정혼자라는 징표로 다시 물려줬다. 계안은 호희에게 은낭과의 사연을 얘기한다. 계안은 부패한 관리 전흥을 귀양 보내면서 은낭의 아버지 섭우후를 감시자로 딸려 보낸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제거하기 위한 계략.
우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은낭이 달려와 구해주고, 그 과정에서 젊은 마경 청년과 은낭이 인연을 맺게 된다. 은낭은 여도사에게 계안을 죽이면 위박이 혼돈에 빠지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하고, 둘은 한차례 검투를 벌인다. 그리고 은낭은 약속대로 마경 청년을 만나 신라로 떠나는데.
상업 영화, 특히 액션이 뛰어난 무협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매우 지루할지 몰라도 영화를 예술적 측면에서 감상하려는 관객에게는 정말 감탄을 넘어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마스터피스이다. 영화는 은낭의 임무 해결을 흑백으로 먼저 보여 준 뒤 타이틀이 올라갈 즈음 컬러로 바뀐다.
그러고는 내내 중국이 넓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 내는데 그건 바로 자연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상가는 자연 혹은 우주, 즉 자연의 섭리를 신으로 상정하는데 여기서는 그게 진리이자 인간의 도리라고 웅변한다. 인간은 그저 우주 섭리 속 하나의 먼지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인간은 국가, 조직, 가족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선택을 해 왔다. 나라, 종교, 소속 조직 등의 이권과 안위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고 때로는 살인도 불사했다. 또 개인적 감정, 특히 복수심에 의해 대상에게 해를 가하거나 살인까지도 해 왔는데 과연 그게 정의일까?
이 영화가 묻는 질문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애초부터 내린 결론이다. 여도사는 은낭이 제거 대상의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 자객의 의무를 포기하자 무예는 초절정 고수이지만 정신 자세가 글러먹었다고 폄훼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해 살생을 밥 먹듯 해 왔는데 그건 옳지 않다.
우리에게는 파리 한 마리조차도 죽일 권리가 없다. 그러니 같은 인간을 죽일 자격 역시 갖추지 못했다. 자연은 어차피 때가 되면 거둬 갈 생명을 수거한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도가의 무위자연(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삶) 사상을 설파한다. 그걸 여러 장의 수묵화 같은 롱 테이크 쇼트로 그려 낸다.
그 그림들은 산수화도, 인물화도 있다. 이 작품에는 BGM이나 OST이라고 할 만한 특별한 음향 효과가 거의 없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지는 퍼커션이 고작이다. 대신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 심지어는 소음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주변 소리를 스크린에 담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 준다.
대사마저도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별로 말이 없다. 호희가 임신한 사실을 안 전 씨가 주술로써 그녀를 암살하려 하자 은낭이 나서 구해준다. 뒤늦게 나타나 경악한 계안이 말 대신 행동만 보여 줄 정도로 대사를 절약한 채 표정과 행동으로 인물들의 감정과 내면의 파도를 드러낼 따름이다.
수묵화는 여백의 미학이라면 이 영화는 여백과 공간의 미학이다. 카메라는 거의 정지 상태에서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자연 풍광을 담아낸다. 인물들은 그 속의 점일 따름이다. 카메라는 거의 정지되어 있거나 아주 천천히 좌나 우로 패닝으로 움직일 정도이다. 공간과 그 속의 여백이 주인공이다.
타이완의 허우 감독은 희한하게도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주장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피투된) 존재이다. 각 개체에게 애초부터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가거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게 바로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다.
은낭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사랑을 빼앗기고 킬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실존이 아닐뿐더러 본질 역시 아니다. 계안 역시 의도와 달리 정략결혼을 했으나 실존 대신 본질을 선택해야만 하는 위치이자 운명이다. “계빈국의 왕이 난조(전설의 새)를 얻었으나 울지 않았다. 거울을 보여 줬더니 슬피 울다가 춤추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대사는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든다. 정말 긴긴 여운을 남기는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