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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Oct 09. 2024

내게 우주를 선물했던 그녀

신입 시절,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대행사에서 가슴 시린 갑질을 당했기에 인하우스에서의 난 좋은 광고주가 되고자 했다. 대단히 인자할 것도 없이 그저 상식선에서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해보잔 각오였다. 가령, 다 만들어 놓은 시안을 갑자기 뒤엎는다든지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아 그들의 워라밸을 개박살 내는 불상사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심플한, 느낌적인 느낌 알지 않냐 같은 난해한 주문도 집어 치고 '최최최최최종'의 파일을 주고받지 않을 구체적 디렉션을 주는 인간이길 노력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작년 여름이었다. 기존 대행사 담당자 퇴사 후 새롭게 우리 브랜드를 맡을 팀장이라며 찾아온 사람이다. 내 또래 AE와 호흡을 맞춰왔는데 그보단 높은 연령의 팀장이라니. 업무를 요청하는 내 입장에선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광고주라고 나를 상사로 모실 것도 아닌데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영업 업무를 오래 해왔단 정보를 건넸다. 광고 분야는 처음이란 뜻이었다. '지나치게' 발랄한 그녀의 모습에 나의 사수는 느낌이 쎄하다며 심드렁했다. 난 그녀가 일처리만 깔끔하다면 성격이야 어쩌든 큰 문제는 아니라 여겼다.


#1.

그렇게 우리의 첫 업무는 시작됐다. 나는 그녀와 우리 브랜드 온라인 파트를 일궈가는 일을 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디자인된 시안을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일이었다. 대행사 직원에겐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터, 첫 업무의 첫 파일을 여는 순간. 나는 많이 놀랐다. 내가 받은 게 대관절 무엇이던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보았다. 그녀는 작성자보다 받는 사람이 더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신비한 재주가 있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기묘한 기획안이 전달됐다. 처음은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싶다가도 정도를 넘은 대참사였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구체적으로, 최대한 의도를 왜곡하지 않게 코멘트를 고치고 또 고치며 피드백을 전했다. 길고 긴 내 답변 뒤에 그녀는 답했다.

넹~수정할게용^^*


용용체의 그녀는 활기차 보였다.



#2.

서울에서 근무하는 나와 내 사수는 대전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 서브로 내부에서 따로 관리하던 계정에 올릴 영상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그 업무에 대행사 직원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전문 장비를 쓸 것도 아니었고 숏컷 영상 하나 찍는데 그 멀리까지 외부 직원을 부르는 게 미안하니까. 대행사 대표님이 연락이 와 그녀의 센스가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며 굳이 그녀를 호출했다. '그녀의 센스'를 경험한 바 있는 나는 서늘했지만 대표님의 강력한 요청에 우리는 대전에서 모이게 됐다.


볕이 강한 날이었다. 외부 촬영이었고 내가 특정 컨셉으로 날뛰면 내 사수가 그걸 찍을 계획이었다. 그녀도 오긴 했으나 인사를 하자마자 잠시 전화를 받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가 보다 하고 사수와 촬영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았고 몇 시간 동안 NG와 OK를 반복했다. 원하던 구도가 나오지 않아 시행착오를 거듭하니 해질 무렵의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촬영을 마쳤다. 잠시 전화를 받겠다던 그녀는 몇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뭘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전화를 걸어봐도 받질 않는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우린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는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먼 친척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구나. '머~언' 친척이 아프다고 전화가 왔구나.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상세한 설명을 들었나보다. 그래 그럴 수 있고, 그거야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지만 굳이 이 먼 곳까지 '일하러'와서 얼굴만 잠시 비추고 다 끝나니 나타난 그녀에게 의문은 생기기 시작했다. 무슨 개인 통화를 업무지에서 몇 시간을 하냐며 내 사수는 노골적으로 어이없어했지만 피해를 준건 아니기에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거기까지 왔으니 맛있는 식사는 대접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너무 맛있다며 연신 함박웃음으로 특유의 발랄함을 잊지 않았다.



#3

2개월 정도 우린 호흡을 맞췄다. 여전히 그녀가 건넨 기획안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피드백을 주면 또 다른 우주가 펼쳐졌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심히 회의감이 들 무렵이었다. 그날도 역시 약속한 시간까지 파일을 보내오지 않았다. 그녀는 늘 제때 뭘 주는 일이 없었기에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마음을 크게 먹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오늘 안에 받을 수는 있는 건지. 그래서 말했다. 늦어지면 늦는다고 답변을 달라고. 혹은 막히는 부분을 알려주면 나머지는 내가 보충하겠다고. 그러자 재기 발랄 용용체의 그녀는 궁서체로 내게 화를 냈다.

아 진짜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온타임을 지키지 않은 건 너잖아. 아.. 미친년인가



#4.

그녀의 우주는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는 정중하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충에 대해 길고도 긴 장문의 카톡을 보내게 됐다. 간절하게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진심으로. 내가 이 정도까지 사정하는데 그녀도 뭔가 깨닫지 않을까. 설령 그녀가 우리 사이의 수렁을 몰랐다면 제발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도 클라이언트가 고충을 이리 길게 말하면 그 회사의 팀장급인 그녀가 나름의 해결책을 준다거나 이토록 형편없는 실력에 대한 핑계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답변이 왔다.

넹!!^^*  



응..?

그게 다야?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니까?




#5.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선 저럴 수 없다. 그녀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지면 이 우주 체험이 끝날까 싶어 스타벅스 기프티콘과 함께 화이팅의 의미를 보내보았다. 씹혔다. 아무런 대꾸가 없는 그녀는 아마 못 본 거라 생각했다. 커피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또다시 개똥 같은 수정 파일을 톡으로 던지며 내 마음을 심란케 했다. 안드로메다급 주술호응과 고쳐지지 않는 오탈자로 당최 뭘 말하고 싶은지조차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 참으로 심오하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고구마 백개 먹다 체한 기분으로 퇴근했다. 기프티콘 따위로는 회유가 안 되는 걸까. 아니면 기프티콘을 못 보고 지나쳤나. 퇴근하며 결제 내역을 보았다. 그녀는 이미 쿠폰을 사용한 후였다. 생색을 내기 위한 건 결코 아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는커녕 방금까지 그녀 때문에 시달리다 퇴근한 나는 ㅆㅂ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미치지 않을까 싶던 3개월 쯔음, 그녀는 자신의 회사에서 잘렸다. 심각하게 굉장했던 그녀의 문제는 좀 더 화끈한 타 광고주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오래된 광고주였는데 그 대행사랑 거래를 끊을 만큼 단디 빡치게 한 모양이다. 그래, 그 맘 나도 안다...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웃기게도 그녀의 퇴사 소식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예정된 문서가 역시나 오질 않아 묻던 중에 돌연 자기가 퇴사를 했다는 게 아닌가. 인수인계고 뭐고 없이 당일에 이렇게 카톡으로 통보한다고? 이하 생략한다. 이별도 그녀다웠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 했던 미지 탐험이 생각나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든다. 내가 사회에서 만난 그녀는 상큼 발랄 고문관이었다.



이 글은 제가 신입 시절 쓴 글입니다. 오래 묵은 글인데 다시 보니 재미있어 발행해 봅니다.(ㅋㅋ) 지금 다시 생각해도 웃긴 사람이었네요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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