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참 복 받으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야간에 조선시대 왕들이 가장 사랑했다는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시는데, 더구나 오늘은 100년 만에 가장 둥글고 큰 보름달이 뜬다고 하니 더 환상적인 창덕궁 달빛 기행이 될 것 같아요. 충분히 여유롭게 즐기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달빛기행을 안내하는 해설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마음은 이미 충분히 휘영청 밝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창덕궁을 야간에 둘러보면서 공연도 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가볼까요?”
궁궐을 야간에 둘러보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는데, 마침 추석 연휴 기간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내에게 의사 타진을 하니 이심전심 꼭 가보자고 한다. 아이들도 흔쾌히 같이 가보자고 하니, 이제 표를 예매하는 일만 남았다.
추석 전날 저녁 7시 30분 시간 예약을 목표로 가족 모두 치열한 티켓팅 전쟁을 펼쳤으나 2장을 구하는 데만 성공하고, 추가 예약 오픈을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하루 전 티켓 2장 추가 구입에 성공하여 네 명 가족이 모두 2022 창덕궁 달빛기행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추석 전날 시간을 이렇게 여유 있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차례상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제사와 차례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유교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든 상황에서, 음식 차림의 일에서나마 벗어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제사나 차례상을 주문하여 보냈는데, 처음에는 크게 탐탁하게 생각지는 않던 어머니나 형님도 점차 적응이 되어, 이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어 전날부터 음식 만드느라 진을 빼던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제사 문화에 대한 생각이야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고 다 나름의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나로서는 유교적 제사문화는 이젠 지난 역사의 유물로 여기고, 남녀 모두에게 의미와 존중을 주는 새로운 추모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다. (다른 줄기의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마치고 나서 저녁을 먹을만한 곳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다 보니 금방 돈화문이 나타난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규모가 크지만 지붕의 선이 날렵한 면이 있어, 위엄을 느끼게 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주기도 한다. 앞에 넓은 월대가 복원이 된 후로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용이해져 사람들이 별로 없는 사이에 기념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본다.
신분 확인하고 안내장과 수신기를 받고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궁궐의 문이 열리고 안내를 맡은 해설사의 나와 입장을 안내한다. 닫혔던 궁궐의 문이 열리며 우리를 맞이하니 뭔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든다.
창덕궁은 이미 여러 차례 가보기도 했거니와 학생들을 데리고 설명도 해 가면서 다닌 경험이 여러 번 있는 터라 장소만으로는 크게 새로운 기대감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조명을 받고 있는 전각들 사이를 청사초롱 불을 밝혀 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경험은 낯선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아내와 아이들도 마냥 기분 좋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사진도 찍으면서 발걸음 가볍게 걷는다.
두 아이 모두 대학교 졸업 학기를 맞고 있으니, 이렇게 행복한 경험과 감정들을 공유하며 쌓아가는 함께하는 시간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신없이 바쁠지 모를 각자의 삶에서도 작은 기쁨들을 만들고 꾸준히 즐겨나가며 살아가길 바라본다.
돈화문을 들어가 청사초롱을 하나 받아 들고 금천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궁궐 기행을 시작한다. 금천교를 건널 때는 대흥사를 찾아 들어가다 만나는 피안교나 선암사의 승선교를 연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마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데서 생기는 연관성인 듯싶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ㅋ)
주변의 어둠을 배경으로, 조명을 받고 또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전각들은 아랫부분이 특히 빛으로 강조되는 데, 인정전 처마의 서까래와 부연, 그리고 그 아래 공포의 화려한 단청은 절로 감탄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니, 저마다 사진으로 이 멋진 체험을 기억 속에 담아 놓는다.
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문화체험을 올 때마다 인생 사진 찍어준다고,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처마 선을 배경으로 한 명씩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주면, 그 결과물에 아이들이 매우 만족감을 보이는,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이다.
그러나 전각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어둠 속에 잠긴 품계석 놓인 넓은 마당, 조정의 모습이었다. 인정문을 들어가면서 보게 되는 인정전 앞에 펼쳐진 넓은 마당의 바닥은 복원하면서 기계로 다듬어진 박석이 깔려 있어 자연스러운 맛이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흐릿한 조명으로 어둠 속에서 살짝씩만 드러나는 돌 마당에는 숨겨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전각 안의 옛이야기보다는 그 마당에서 이루어졌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희정당을 거쳐 낙선재로 이동해 갈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은은한 달빛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이 불현듯 연상되었는데, 달을 꺼내놓기 위해 해설사 분이 노력을 많이 하셨다니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낙선재로 들어선다.
낙선재의 정문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장락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서왕모의 월궁 이름이 장락이니 신선 같은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꿈이 담겨 있겠다. 올해 보름달이 100년 만의 가장 둥글고 큰 보름달이라는데, 월궁으로 들어서서 달을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번진다.
낙선재는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사대부집의 형식으로 건축되었지만 다양한 문양 장식이 눈길을 끈다.
평소에는 들어가지 못했던 뒤뜰로 들어가니 아름다운 화계(花階)가 있는데, 괴석과 꽃, 나무 등으로 신선의 세계를 꾸며 놓았다. 화려한 담장 문양과 굴뚝을 장식의 도구로 사용한 지혜에도 감탄을 한다.
그러나 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더 운치를 자아내는 창문의 창살 문양이다.
다양한 무늬로 개성적 모습을 한껏 꾸미고 있으나 균형과 절제를 잃지 않은 우아함에서 고수의 품격을 읽고 간다.
화계의 계단을 올라 상량정 앞뜰로 오르니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주는 대금 연주가 상량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금의 가락에 대해서야 문외한이지만, 그동안 창덕궁을 관람하며 들어와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된 들뜬 마음과 공기를 물들이고 지나가는 애잔한 가락에 신선이 된 기분이 따로 없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문양을 문 위에 새겨 넣은 둥근 만월문을 통과하여 나와서, 뒤로 돌아 바라보니 상량정과 낙선재 위로 호사가들이 말하던 그 큰 달이 아직은 구름에서 다 벗어나지 못해 오히려 더 은은한 빛을 흘리며 분위기를 돋워 준다. 오늘이 추석 전야, 가장 크게 찬 달은 아닐 수 있으나 이미 모든 것이 채워진 마음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한참이나 달구경을 하다 후원으로 발걸음을 돌려 들어가는데 조명이 비치고 있는 나무를 지나갈 때 해설사의 기분 좋은 유머. “달구경 잘하셨어요?”, “달구경을 하다 혹시 별도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별이 잘 보이는 곳에 섰습니다. 하늘을 보시고 별을 감상하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