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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오렌지 Dec 22. 2022

태안읍 송암리 간사지 외딴집

지칭개를 아시나요?

 



   '야, 이거 냉이 아닌거 같은디'


  냉이된장찌개 끓어놨으니 밥이랑 드시라고 한 뒤 집에서 나온지 10분도 안되서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남편이 밭둑에서 캐온 큼지막하고 싱싱한 그것이, 내가 야무지게 손질하고 반은 된장 풀어 두부와 같이 끓이고, 반은 우리 먹으려고 챙겨온 냉이가 그 냉이가 아니란다. 너무 써서 못 먹겠다며 너네 가져간 것도 다 버리라는 말에 우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집에가서 보니 어쩐지 냉이향이 전혀 나질 않는다. 하나하나 코를 대고 킁킁대던 남편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난 또 한참을 웃었다.

 그럼 냉이 형처럼 생긴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자랑스런 전리품은 냉이가 아니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지칭개'라는 풀이었다. 국화과 식물로 자주색 꽃을 피우는 지칭개는 쓴 맛이 강해서 먹으려면 이틀을 물에 담가둬야한단다. 냉이와 지칭개 사진을 나란히 두고 보니 다르게 생기긴했다. 지칭개 잎이 훨씬 크고 초록빛에 뿌리는 민들레와 닮았다. 냉이는 톱니모양의 잎이 더 촘촘하고 작고 땅바닥에 납작 붙어있다. 뿌리도 하얀색이다. 시어머니께도 사진과 영상을 보내드렸더니 깔깔거리시면서 전화를 하셨다. 냉이는 캐자마자 향이 어마어마하다며,  너네를 어쩌면 좋냐고, 어머님도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이렇게 냉이랑 지칭개도 구별못하는 우리 부부가 시골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귀농도 귀촌도 아닌  한량의 삶을 살아보려고 말이다. 차로 15분 거리에서 아빠와 동생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나는 아직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다. 농사를 도울 생각도 없으면서 굳이 옆으로 내려온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원래 제주도로 가고 싶었다. 모두가 제주도로 가고 싶어하는 그 이유 때문에. 하지만 제주도 년세만 해도 천만원이 넘는다는데, 육지보다 물가도 훨씬 비싸다는데 하며 따져보니 결국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것은 태안에서도 할 수 있는 거겠다 싶었다. 집세도 쌌고, 무엇보다 친정이 가까이 있어 든든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태안으로 내려왔다. 

  이사 직후엔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다. 2주동안 밤낮없이 이사짐을 정리해야했기 때문이다. 객지생활 12년, 결혼 생활 4년동안 모은 짐이었다. 사람 둘, 고양이 하나의 물건이 하나둘씩 모일 때는 몰랐는데 한꺼번에 옮기려니 적지 않았다. 어제 옷방을 마지막으로 커다란 정리는 모두 끝났다. 안 들어가는 짐들, 버리긴 아깝고 당장 쓰지 않을 것들은 따로 빼뒀다. 아침에 느긋이 일어나 샌드위치를 먹고 빈둥대다 그 짐들을 챙겨 송암집으로 마실을 간다. 

 시댁은 마석집, 친정은 송암집이다.  나의 살던 고향, 송암리 그 중에서도 친정집은 간사지의 외딴집이다. 아주 오래전 갯벌이었던 곳이 간척 사업으로 농지가 된 곳 이다. 그래서 아직도 토양 속 염분이 많다고 한다. 그 땅에 우리 부모님은 온갖 것을 심었다. 논에는 벼를 심고, 밭에는 마늘이며 콩이며 꽃이며 심었다. 땅이 짜서 대부분 식물을 키우는데 조금 어려웠지만, 아빠는 커다란 정수기를 만들고 지하수를 걸러다 식물에 다시 뿌렸다. 그렇게 간사지 땅은 점점 더 바다에서 멀어서 농부의 땅이 되었다. 나도 그 땅에서 짠 지하수물을 마시며 자랐다. 우리집은 오랜된 조립식 주택이다. 집도 짓다 말아서 허연 외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20년도 넘은 집이다.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지어진 집이다. 그 전 까지 우리식구는 창고가 붙어는, 쥐와 벌레가 득실대는 곳에 살았다. 전전에는 돼지우리 옆에 딸린 방에 살았다. 엄마는 그런 곳에서도 다라이에 향긋한 입욕제를 풀어 우리 남매를 씼겼고, 다른 친구들 집에선 볼 수 없는 핫케익을 간식으로 구워주시곤 했다. 

  우리 부모님은 하우스에서 꽃농사도 짓고, 난농사도 지었다.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 그렇듯 하루도 쉬지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올라 갈 때 쯤 땅을 새로 돋우고 그 뒤에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그 때는 조립식 집이 한창 유행이었다.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하던 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도 2개, 안방 따로 동생과 내 방이 각각 있고, 거기에 여분의 손님 방까지 있었다. 집 크기에 맞게 커다란 티비도 생겼고, 거실에는 무려 쇼파가 있었다. 침대며, 붙박이장이며, 다 새거였고, 집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설레였다, 이제 우리 식구 앞에 꽃길만 남은 줄 알았다. 동네사람들이면 친척들, 그 밖에 멀리 살던 지인들도 집들이를 왔고, 엄마는 손님들을 치뤘다.  그렇게 아직 새집에 대한 설레임이 남아있고 초등학생이던 내가 중학생이 된 어느날, 우리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한 뒤 두 분은 종종 싸우셨다. 어느날 학교에 갔다 오니 집에 엄마가 없었다. 내 일기장 뒤에 뭐라뭐라 쓴 편지만 몇줄 남았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그 때부터 부모님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빠와 엄마의 인생이고 당신들의 선택이다. 나 또한 나의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이다.  

 그 뒤로 엄마 역할을 할 여러 사람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묵묵히 EBS 교재를 풀며 수능을 준비했다. 0교시와 야자시간까지 있던 시대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토요일에도 자습하러 학교에 나갔다. 그렇게 공부만 하던  나는 서울로 대학을 왔고, 그 때 부터 객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가 살다 보니 우리집이, 우리 동네가 너무나 그리웠다. 특히나 노을질 때, 해는 떨어져 보이지 않지만 그 어스름한 빛이 남은 그 시간엔 언제나 그리움에 코끝이 시렸다. 서산너머 해님이 숨박꼭질 할 때에, 태안이 그 해님이 넘어가는 서쪽 끝이어서 그런가. 신입생 시절에는 종종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 무렵 아빠는 필리핀에서 새로운 반려자와 배다른 동생을 데려왔다. 나는 성인이었고, 이미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었고, 무엇보다 집을 떠나있었기에 새 가족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빠의 새 반려자는 나보다 어렸지만 똑똑하고 착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데려온 아기는 너무 귀여웠다. 어릴 적 사진에서 보던 동생과도 닮은것 같았다. 그 아기는 어느덧 자라 누나누나, 형님형님 하며 따라다녔다. 중국 유학 당시에 영상통화를 하면 끊지 말라며 울었고, 방학 때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출국하는 날엔 공항까지 따라와 떠나가라 울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다시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 즈음 나는 유산을 했다.  

  나는 태안에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빠의 인생을 인정을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고, 자주 가지는 않아도 마음의 안식처였던 고향을 생각 하는 것 조차 가슴을 짓누르게 만들었다. 내가 그 옛날 할머니처럼 대신 아빠가 채우지 못하는 빈 자리를 채울 마음도 없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며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태안에 내려와 짐을 풀었다. 내가 돌아오게 된 것은  남편과 동생 때문이었다.

  태안으로 오자고 했던 것은 남편이었다. 그 말을 꺼냈을 때 정말 괜찮겠냐고 10번은 물어봤다. 어쨋든 나야 친정이고 익숙한 곳이지만 남편에게는 처가에다 태안과 서산을 헷갈려 할 정도로 낯선 곳이고,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남편에겐 태안은 '너무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오히려 우리가 친정 곁으로 가면 동생이나 아버지께 민폐가 아닌지 걱정했다. 서로 각자의 걱정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 있었다.  환경을 바꾸고,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자는 것. 그렇게해서 후보지에 있던 곳은 제주도, 통영, 강원도 마지막으로 태안이었다. 우리의 현실적 요건에 맞는 곳은 태안이었다. 비용도 그렇고,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더 고민하기에는 우린 버틸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의 건강이 갈 수록 나빠졌다. 우리는 건강한 삶과 온전한 시간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보하듯 퇴사를 결정하고 짐싸서 내려 온 것이다.  

 내 바로 밑 동생은 내가 떠나있는 동안 아빠의 옆자리를 지켰다.  아빠가 힘에 부쳐하는 농장을 꾸역꾸역 이어받고 있었다. 동생이 묵묵히 장남의 역할을 해주기에 나는 홀가분히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동생의 부담감에 대한 미안함을 덜기 위해 점점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우리가 태안으로 내려간다고 결정했을 때도 동생은 "누나 농장은 걱정하지 말고 누나랑 매형 하고 싶은 거 해"라며 먼저 말해줬다. 누가 와서 일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농사 짓지 않겠다고 우겼고, 동생은 그 때마다 그래, 알았어. 라고 해줬다. 

  동생은 아빠와 아주 닮았다. 평생을 같이 살아서 그런지 말투, 걸음걸이, 목소리까지 비슷해서 어떨 땐 전화를 걸고서 "누구야?"라고 묻는다. 그렇지만 성향,성격, 기질, 가치관 등등이 너무 달라 종종 싸우고 상처받는다. 싸우면 번갈아 전화가 온다. 시작 멘트가 둘이 똑같다. "밥은 먹었어?" 밥 때도 아니고, 살갑고 실없게 밥 안부 묻지도 않던 사람들이 말이다. 어쩐지 지칭개와 냉이가 생각이 나는 관계다. 나는 이 둘 사이에서 민들레 쯤 될까.그래서 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내가 내려온다 했을 때, 내려와서 농사는 짓지 않지만 쌀은 얻어 먹겠다고 배짱을 부려도 기꺼이 나를 받아 준것은 내가 민들레이기 때문일까.

   덕분에 이사 2주 째인 지금 유유히 냉이(가 아닌 지칭개)를 캐고, 미나리를 뜯어가며 한량놀이를 하고 있다. 오늘은 눈 밭을 헤치고 하찮은 표고버섯도 땄다. 관여하지 않겠다던 친정에는 우리집에 더이상 들어가지 않는 짐들을 맡긴다는 핑계로  왔다갔다 하며 부족한 살림을 채워주고 있다. 청소도 해주고, 식기세척기도 사놓고, 쇼파도 가져다 놓고, 고기도 사놓았다. 요리 잘하는 남편 덕에  냉장고를 뒤져 든든한 저녁상도 차린다. 아니 이 집 냉동고에는 없는게 없다. 꽃게다리(?), 조개살, 알 수 없는 생선들, 고기 등등. 잔뜩 쟁여두고 요리할 시간 없어 빙하기 공룡들 마냥 언 재료들을 요리조리 둘리로 만드는 남편이다. 아빠는 사위 덕에 요즘 호강한다며 좋아하신다.  오늘은 물텅뱅이(물메기)탕을 끓여먹었다. 요 이틀 새 눈이 내려 얼어버린 미나리도 좀 뜯어다 넣었다. 동생에게 진짜 미나리가 맞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불을 비추던 동생이 옆 뚝생이 바닥을 보며 이게 냉이라고 일러줬다. 정말 더 촘촘한 톱니 자국의 붉은 냉이 잎사귀가 땅위에 납작 붙어있었다. 호미도 없이  꽁꽁 언 땅에서 캐내려다 손만 긁혔다. 요즘 냉이 캐는 것만 해도 하루에 5만원을 번다는데, 한 뿌리를 캐보니 하루종일 캐고 5만원 받는 것은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오면 녹은 땅에서 냉이랑 씀바귀를 캐다 무쳐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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