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Jan 25. 2022

14000601분의 1 확률

아빠의 저주 같은 말


요즘 우리 집 중딩이는 우울하다. 아니 즐겁다. 아니 우울하고 즐겁다를 반복 중이다.


평소 기본값은 우울과 짜증이지만 친구들과 게임을 할 때면 신나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저 아이가 한 사람이 맞나를 의심하는 날도 있다. 남편은 아이가 노래하고 떠드는 순간에도 컴퓨터 앞을 못 떠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나 또한 그 모습이 반갑거나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파서 약을 먹거나 우울해서 유튜브로 도망가 있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보다는 덜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입에서 저주 같은 말이 떨어졌다. 

아이는 저녁상이 차려지기 전까지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이제 게임은 그만하고 나오라고 얘기했지만 게임 속 세상에서는 목숨을 건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쟁에서 전우를 버리고 나가는 것은 배신 행위였기 때문에 아이는 공격을 멈추지 못하고 잠깐 만요를 외쳐댔다. 그러다가 결국 아빠의 호통을 이기지 못하고 나온 아이에게 남편은 얘기했다.


'너 이렇게 게임만 하고 살래? 너 앞으로 어떻게 클지 뻔히 보여. 넌 이렇게 살다가 학교도 겨우 졸업할 거야. 그러고 나서 오타쿠처럼 집에 처박혀서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는 놈이 될 거라고!'


곁에서 이 말을 들은 나는 정말 슬펐다. 그리고 동의할 수 없었다. 남편의 이야기에 토를 달면 싸움이 시작되고 일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미 여러 번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이는 남도 아닌 자신의 아빠가 만든 저주 같은 정체성을 믿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쟤 하는 거 봐.


당신... 혹시 점쟁이야? 난 내 미래도 잘 안 보이는데. 당신은 당신 미래를 알고 있었어? 우리 박시 미래가 보여? 혹시 저주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 화가 난 남편이 또 다른 말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에게 말했다.

박시야. 너 어벤저스 앤드 게임 기억나? 타노스랑 싸우는 거. 거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나오지? 그 사람이 계속 미래로 가서 타노스를 이길 수 있는지 보잖아. 수백 가지, 수만 가지의 미래를 봐. 그 미래 중 하나가 현실이 되는 거지. 아빠는 너의 수백만 가지의 미래 중 하나를 얘기하는 거야. 아빠는 네가 잘못될까봐 걱정된대.

하지만 엄마는 다른 미래도 있다는 걸 알아. 박시 너는 좋아하는 것에 깊이 빠지는 아이였어. 레고, 한자, 그림에 빠져서 한동안은 그것만 하며 살았었지. 지금 빠져있는 것이 친구들과 하는 게임일 뿐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좋아하는 다른 것이 생길 거라는 거 알아. 넌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느낌을 아니까 게임 말고도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어.


박시야 너의 미래는 한 가지가 아니야. 그걸 선택하는 사람은 너야. 




14000601분의 1 확률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타노스를 이길 확률이다. 하지만 내 곁에 아이는 이보다 더 높은 확률을 뚫고 태어났다. 몇조 분의 1을 뚫고 태어난 아이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미래를 들이밀지 말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