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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Apr 06. 2022

날 기쁘게 해 봐

5만원짜리 기쁨

설이 되어 시댁에 갔다.


3명의 작은 아버지가 오시고 우리 가족까지 모였으니 적어도 4명의 큰아들, 그 아들의 자식들만 해도 9명. 며느리까지 해서 17명은 왔어야 했다. 하지만 한집은 아이들이 어려서, 두 집은 코로나가 걱정되어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집안에 아이는 우리집 일곱살 둘째 율이 혼자였다.

삼촌들이 결혼을 하고 동생들이 태어나서 가족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는데 오늘만큼은 율이가 어른들의 관심을 듬뿍 받았다. 그리고 어른들의 관심은 용돈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들의 곁을 열심히 오가며 용돈을 받는 아이의 얼굴은 기쁨으로 상기되었다. 그러다가 막내 할아버지 차례가 됐다.

막내 할아버지는 한 손에 5만원권 지폐를 들고 아이를 앞에 세워둔 채로 말씀하셨다.




날 기쁘게 해 봐




내가 잘못 들었나? 아이도 바로 네?라고 다시 물어봤다.


'날 기쁘게 해 보라고.' 5만원짜리 기쁨은 어떻게 생긴 건가. 율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래하고 춤췄던 적이 없다. 만약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춤을 췄다면 그것은 상대의 기뻐하는 모습이 자신에게도 기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네?라고 다시 묻자 막내 할아버지는 답답해하며 질문을 바꿨다.




너 잘하는 거 해보라고.




그 질문도 틀렸다. 율이가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할 때 난 아이에게 '넌 최고야. 그림을 완전 잘 그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림에 카멜레온이 있네. 이건 뭘 그린 거야? 난 율이 노래가 참 좋아~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잘하는 것을 해보라는 말에도 율이는 답하지 못했다.





네?




어리둥절해하시는 막내 작은 할아버지를 보며 율이에게 내가 다시 말해줬다. '율이가 좋아하는 것이 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아.' 그랬더니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침 바람 좋아해요. 저랑 같이해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아침 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님 계실 적에 엽서 한 장 써주세요.'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잡고 손놀이를 했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숨긴 손가락이 뭐냐고 묻는다. 막내 작은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용돈을 건네주셨는데 그때의 표정은 물건을 살 때의 당당함은 아니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조도 아니고,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돈으로 기쁨을 샀던 경험이 얼마나 많았으면 가족에게도 저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그런데 글을 쓰며 그날의 장면을 천천히 회상해보니 막내 작은 할아버지가 가엽고 불쌍하다. 돈이 없으면 기뻐할 수 없는 인생이란 정말 끔찍할 것 같다. 돈이 없으면 내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이도, 내 손을 잡아주는 이도 없다는 것. 이처럼 외롭고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작은 아버지 얼굴에 잠깐 스친 당혹스러움, 낯섦, 어색한 미소가 그의 마음에서도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날 기쁘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잘하는 것이 없어도 이미 존재 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

정말 사랑한다면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뭘 할 때 즐겁냐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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