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금요일 저녁 7시에 마을 공원에서 박시와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그리고 저녁밥을 먹고 나온 동네 아이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꼭 물어본다.
“저도 같이 놀아도 돼요?”
“그래! 같이 놀자!”
그렇게 함께한 놀이는 9시가 되어야 끝이 나고 우리는 헤어지면서 약속을 한다.
“다음 주 금요일 7시에도 우리 여기서 놀 건데 너희도 나와~”
매주 금요일 7시, 그렇게 여름밤 ‘그곳에~있다’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했다. 여러 번 만난 아이들에게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통화로 인사를 나누고 늦게까지 놀이를 한다. 모두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올 때면 11시가 다되어서 집에 들어가는 날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피곤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이들의 숨넘어가는 웃음을 봤고 즐거움의 비명을 들었으며 그들과 땀나는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만약 위와 같은 놀이를 동네에서 오랫동안 해보고 싶다면 지켜야 하는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들과 함께 나오라고 하면 부모들이 피곤할 때는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럼 한주 두 주 빠지게 되기도 하고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낯가림이 있는 분들은 아이들을 안 보내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과만 약속을 한다. 아이들이 나가노는 금요일 저녁 시간은 엄마들에게 맥주 한잔을 하며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왜 아이만 매번 보내? 엄마들 너무한다. 애들 음료비와 간식비로 나가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면... 관둬야 한다. 그런 마음이 쌓이면 즐겁게 놀 수 없다.
남편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부모들은 쉬는 이 시간에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남들 돈 벌 때 왜 그 집 애들을 봐주고 있는지. 어떤 날은 한심해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답답해도 하고. 어떤 날은 화도 냈다. 남편은 내가 자기랑 놀아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 남편은 회식이나 술자리가 많았고 난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하는 것보다 아이들과 노는 것이 더 즐거웠다.
난 어린 시절 골목길이 복잡한 마을에서 살았다. 학교 끝나면 가방을 던지고 밖에 나가서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부름이 있기 전까지 놀았고, 밥 먹고 나서 또 나가 놀았다. 밤 9시가 넘어서까지 마을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 했던 놀이들이 기억날 때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난 고무줄의 여왕이었고 만만세도 거뜬히 깨는 아이였다. 내가 살린 동지들이 몇 명이었던가. 문 앞에서 아이들이 같이 놀자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지금은 듣기 어려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놀자고 부르는 소리들이 참 아쉽고 그립다.
맘껏 놀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또래 사람들이 모두 놀며 자랐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 지인의 한마디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음...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구나. 그 당시에도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은 사교육 엄청나게 시켰는데. 그때도 아파트 살았던 애들은 골목에서 놀고 했던 경험 별로 없을 걸? “
물론 개인적 의견이고 이 말을 모두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기억을 되돌려보니... 어떤 부분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동네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맞벌이가 많았고 그래서 모두 골목에 나와 놀았었다. 배가 고팠을 때 집에 먹을 것이 없으면 집안에 고물들을 모두 가지고 나와 고물상 아저씨에게 팔고 그 돈으로 핫케이크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 맞다. 그때 집엔 어른이 없었다.
그리고 학원을 강제로 등록해 본 적도 없다. 교육관이 ‘아이들을 놀아야 한다.‘는 아니었던 것 같고 빠듯한 살림에 학원비가 부담이셨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때 다녔던 컴퓨터 학원이다. 너무 다니고 싶어서 조르고 졸라서 몇 개월 다녔던 컴퓨터 학원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배웠던 것들이 기억난다.
만약 우리 집이 부유하지 못해서 학원을 많이 다니지 못했던 것이라면, 동네가 잘 살지 못해서 맞벌이가 많았고 그래서 우리가 방치(?)된 삶을 살았던 것이라면, 그 점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모들의 특별 관리를 받지 못했고 자유의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법에 대해 배웠던 것 같다.
위에서 방치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 어른들이 집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 언제나 돌봄 받고 있다는 안전한 기분은 들었다. 항상 동네의 문들은 열려있었고 어떤 집에 가면 어른이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없었고 항상 동네를 지나다니는 채소, 생선, 고물상 리어카 아저씨가 놀고 있는 우리를 지켜봤다. 혼자 노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내 친구가 어른을 불러오거나 가장 가까운 대문을 두드리면 된다. 그리고 집 사이 간격이 정말 좁고 문이 열려있어서 울음소리 한방이면 사건 해결이었다.
예전과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옆집 아저씨, 뒷집 언니, 앞집 아줌마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없고 항상 모르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세상이다. 지금의 기준과 관점으로 과거 우리 동네를 보면 정말 위험한 요소가 많았던 곳이다. 앞집 잘 사는 오빠가 놀러 오라고 하면 달려 들어가서 맛있는 외국과자도 얻어먹고 빈집에 아이들끼리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들인지. 그리고 자칫하면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있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주고 돌봐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들이다.
난 지금도 그 동네에서의 기억들이 참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고 내가 사는 곳도 그런 곳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이 위험할 때 내 아이와 가족을 지켜주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맛있는 것이 생기면 옆집 할머니와 나누고 집 아래 슈퍼를 가면 열심히 인사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꼭 인사를 시킨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돌떡을 돌리며 탄생을 알리고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사람들과 공유한다. 이것은 내가 없을 때 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지켜봐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들이다. 내가 24시간 아이와 함께 다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곁에 없는 틈들을 우리 이웃들이 메워줄 수 있다. 급할 땐 옆집 할머니네 문을 두드려라. 무서울 땐 언제든 슈퍼로 뛰어 들어가라. 이것이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안전장치다.
난 폐지 줍는 할머니께도 인사를 시킨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할머니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시니 우리 아이를 만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인간 CCTV,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둘째, 폐지 할머니께 인사하는 것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환경오염을 막아주는 멋진 분이시다. 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너 그렇게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 할머니처럼 폐지 줍고 다닌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싫다. 나이 들어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폐지 줍는 할머니들이 계셔서 우리가 받는 도움들이 묻히고 그들의 일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들처럼 되는 것을 경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받는 도움에 감사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셋째, 우리 동네 폐지 할머니는 항상 우리 아이를 보면 첫인사로 ‘아이고 우리 예쁜이~사랑한다’고 인사하신다. 그게 참 고맙다. 물론 거칠고 더러워진 손을 씻을 틈도 없이 아이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받으니 괜찮다. 그게 입에 발린 소리일 수 있지만 서비스센터에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멘트보다 따뜻하고 기분 좋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