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사흘 전 살라망카에서 하던 스페인어 공부를 일단 마무리하고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 위의 라바날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정식으로 비자를 받기 위해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쿠바에 있는 저희 공동체 방문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입국한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총재인 예레미야스 슈뢰더 아빠스가 직접 차를 몰고 와서 저를 라바날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마침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에두아르도 신부도 주말을 이용해 짧게 수도원을 방문해서 모처럼 라바날 공동체가 북적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에두아르도 신부가 저를 따로 붙잡고 한참 음악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바흐를 주제로 이야기 하다가 바로크 음악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서로 신나서 계속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새 존 다울런드가 작곡한 ‘라크리매, 혹은 일곱 방울 눈물’(Lachrimae, or Seaven Tears)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존 다울런드의 이 노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에두아르도 신부는 핸드폰을 꺼내서 온갖 버전의 눈물 곡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고, 에두아르도 신부도 그렇고 ‘이 곡이 왜 그렇게 좋을까, 마음을 울릴까’ 생각해 봤습니다. 곡 자체가 주는 울림이 있고, 옛 악기의 현소리가 주는 어떤 아스라한 향수와 동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곡 형식으로도 기본 주제는 계속 반복되는데, 그냥 똑같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변하면서 되풀이됩니다.
때로는 음들을 많이 덧붙여서 많이 발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때로는 과감하게 음들을 빼기도 하고 조금 많이 바꾸기도 합니다. 주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어느새 다시 원래 나아가던 방향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주제가 반복되는 와중에 끊임없는 변주로 늘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이 음악은 어떻게 보면 우리 삶하고도, 그리고 전례와도 닮아 있습니다.
물론 평소에는 우리 삶이나 전례가 늘 똑같은 것 같아 조금 지루함을 느끼는 편이긴 한데, 그래도 아주 가끔은 늘 똑같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데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는 날이 있습니다.
음악에는 반복되는 가운데 변화,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방법이 상당히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존 다울런드의 눈물 곡들은 주제를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를 주는 ‘변주곡’(Variation)에 해당합니다. 변주곡들도 워낙에 종류가 많아서 이게 어떤 음악 장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반복되는 주제에 변화를 주는 곡’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변주곡들 가운데 특별히 베이스가 고집스럽게 반복되는 방법을 사용한 음악들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어 ‘오스티나토’(Ostinato)가 바로 이런 방법인데요, 고집을 부리고 변함없이 끝까지 버틴다는 뜻의 라틴어 ‘옵스티나투스’(Obstinatus)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종류의 곡들 가운데 이 반복이 주로 베이스에서 되는 경우, 베이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바쏘’(Basso)를 붙여 ‘바쏘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 바쏘 오스티나토 기법을 사용한 종류의 곡들 가운데 유명한 종류는 ‘샤콘느’(Chaconne), ‘파사칼리아’(Passacaglia), ‘그라운드’(Ground)가 유명합니다. 그밖에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폴리아’(Folia), ‘로마네스카’(Romanesca) 등도 오스티나토 방법을 사용합니다. 인터넷에서 위의 제목들로 검색하시면 다양한 곡들을 찾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바로크 시대 이후 오스티나토 방법을 사용한 음악의 인기가 조금 많이 시들해져서 이런 곡들을 많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재즈나 현대 대중음악에서 다시 이런 방법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마 오스티나토가 본래 반복되는 기본 주제와 함께 다양한 변주를 즉흥으로 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만큼, 현대 음악이 여기에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재즈에서는 ‘뱀프’(Vamp), 록 음악에서는 ‘리프’(Riff), 현대 전자 음악에서는 ‘루프’(Loop)라는 이름들이 사용되는데, 크게 봐서 일종의 오스티나토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주제가 반복되면서 변화를 주는 방법은 음악에 아주 많습니다. ‘카논’(Canon)이나 ‘푸가’(Fuga)처럼 어떤 주제를 계속 모방해서 엄격하게 만들어지는 곡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엄격함 없이 아주 자유롭게 만들어진 곡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드문 편입니다. 보통 어떤 곡이든 주제가 있고, 그 주제가 몇 차례 같게 혹은 다르게 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곳 라바날 공동체에서는 매일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릅니다. 저는 옛 기호사본을 배웠고, 중세 때 이 곡을 어떻게 불렀을까 하면서 다시 재구성하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솔렘 수도원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다시 부흥시키면서 당시 연구 부족으로 오류가 있는 곡들을 부릅니다. 이미 150여년 정도가 되었으니 아쉽지만 이것도 전통이라 해야겠지요. 그래서 여기에서도 저희 형제들은 평소 외우던 곡을 솔렘의 방식으로 부르니, 저한테는 조금 많이 단조롭습니다. 게다가 웬만해서 일주일 내내 똑같은 곡들만 부르니까 더하지요. 가끔 잘못 부르기 시작하면 일주일 내내 똑같은 데에서 똑같이 틀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계속 반복해서 부르다 보면 아니 이 반복이 계속되다 보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조그마한 기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인데요, 어떤 한 가사나 단어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 어떤 멜로디가 ‘어?’하고 확 와닿기도 합니다. 온갖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묵상이 있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계속 반복하면서 덜어내고 덜어내어 단순함 가운데 머무르는 묵상도 있습니다. 거기에 계속 반복하는 삶과 행위가 사람을 더욱 단순하게 만들어주면 조그마한 변화도 금세 알아챌 만큼 감수성이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저희 선배 수사님들 가운데 단순하면서 감성이 풍부한, 닮고 싶은 분들이 계셔서 그 덕에 ‘이런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 다울런드의 눈물, 라크리매부터 시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같은 음악을 부르고 들으며 늘 같아 보이는 전례에 계속 참여하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을 살더라도, 그 안에서 변화되는 게 무엇인지 새로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반복되는 게 주는 편안함이 무엇인지 감수성을 넓힐 계기가 되기 바라면서 함께 이런 음악들을 감상하고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