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73
신문화 60년: 영화
노 만
영화가 '제 7예술'로 등장하게 된 것이 불과 1세기 미만이고, 또한 가장 나이가 어리고 '유일하게 그 탄생일을 아는 예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나라의 사람 손을 거쳐 완성(1895)된 이 영화는, 숙명적으로 대중성을 지니게 된 것이라 하겠다.
한국에 이 영화가 소개된지가 1903년이니까 65년이 지났다. 그 당시만 해도 현대문명 이기가 거의 외국인(주란 외국공관원)의 손에 의해 소개되고 있었고 유성기(전축)을 가지고 흥행을 하고 있을 때이니만큼, 활동사진은 경이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활동사진이라고 불리우던 영화의 형태는 오늘날의 극영화와는 거리가 먼 실사(實寫)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서대문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부설했던 한미전기회사에서 전차 수입을 올리기 위해 이 영화를 전차 차고를 개량하여 상영했던 것이다. 이 단편 실사작품이 인기를 모으게 됨에 따라 상품선전을 위해 여러 회사가 이 영화를 수입 공개했고 본격적인 흥행관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입 영화에 한했고 좀처럼 영화가 만들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구한말이 외세에 몰려 쓸어지고 그 치욕적인 한일합방이 성립되는 사회환경 속에서 영화는 계속 수입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표면적이나마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됨으로 언론 출판의 자유가 어느정도 허용되었다. 조선, 동아의 창간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1910년부터 대두했던 혁신단을 비롯한 신파 연극은 이 시기에 와서 치열한 경쟁을 벌리고 있었다. 즉 임성구의 '혁신단', 김도산의 '신극좌', 김소랑의 '취성좌', 이기세의 '문예단' 등의 천편일률적인 신파극은 관객을 잃고 파산 직전에 있었다. 그 탈출구가 바로 키노.드라마(연쇄극)였다.
연쇄극이란 무대에서 도저히 재연할 수 없는 장면을 필름으로 찍어 막과 막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이었으니,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여하튼 김도산의 최초의 시도 연쇄극 <의리적구토>가 그해 10월 27일 단성사 무대에서 선을 보였다. 막대한 제작비로 완성된 이 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게 됨에 연쇄극 붐을 형성하게 됐다.
<의리적구토>가 상연된(상영이 아니다) 1919년 10월 27일 오늘날 영화인들은 '영화의 날'로 정하고 금년에는 대종상과 함께 성대히 거행했다.
과연 연쇄극을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달리 취급되어야겠지만, 명백히 밝혀 두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닌 연극에 예속된 연극의 한 방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키노.드라마에 등장하는 필름만을 독립시켜 영사를 하면 아무런 의미(여기엔 내용도 실사도 없다)가 없다. 도대체 독립시켜 본다는 것이 모순이다. 다만 처음으로 한국 사람이 영사막에 등장한다는 소박한 자위(이것이 연쇄극 성공의 요인이었다) 뿐이리라.
<의리적구토>와 같이 상영된 서울 시가를 촬영한 실사 작품이 차라리 한국영화의 출발점으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영화 50년이란 타이틀이 붙게 된다.
1923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흥행극영화가 제작되었다. 윤백남의 PR영화 <월하의 맹세>가 톱을 끊으며 드디어 <춘향전>으로 본격 흥행영화시대로 접어든다. 영화의 기업화를 표방하면서 출발했찌만 영화인구 및 시장의 협소로 인해 기업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초창기 그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기업화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였다.
더구나 훈련된 전문화된 인물이 없는 시기였기에 연기자도 기생, 변사 등의 인기인을 기용했고 가장 중요한 촬영, 연출, 시나리오, 제작 등이 분업화되지 않고 있었다.
<춘향전>의 경우 제작, 각본, 연출 등 가장 중요한 부문을 일인 조천이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작품의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으니 오늘날 이 작품을 한국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엄격히 말한다면 이런 작품은 한국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영화라고 해야 옳다.
1924년 9월 5일에 개봉한 <장화홍련전>이야말로 한국인의 손에 의해 한국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촬영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일인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던 것을 이필우에 의해 완성했던 것이 특기할 만 한 사실이었다.
한국 흥행극영화가 이 해부터 출발했으나 우후죽순 같이 난입한 프로덕션에서 일사일작이란 과도기적 현상을 보였을 뿐 작품 다운 작품이 없었다.
1926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혜성같이 두각을 나타낸 나운규에 의해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었다.
<아리랑>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활동사진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영화가 예술로서의 그 위치를 향상시키고 그 면목을 일신했다.
이때부터 영화를 '활동사진'이라고 부르던 것을 영화로-- 또 예술로서의 영화로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만큼 <아리랑>이 준 영향이 컸고 그 공을 높이 평가치 않을 수 없다.
영화사조 상으로 봐도 이 시기에 몽따쥬 이론이 완성되고 아방가르드 운동이 전개되고 표현주의 영화가 대두되고 있던 때였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흥행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표현 기법상으로도 높이 평가하게됐다.
환상신-- 사막 장면은 나운규의 주제가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광인 영진'으로 하여금 살인할 수 있는 모티브를 설정한 것이었다. 곧 심리적 몽따쥬 수법의 성공이었다. 사막에서 대상의 물은 곧 일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일제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저항이었다.
<아리랑>은 고양이와 개라는 상징적인 자막에서부터 시작되어 광인 영진과 기호가 견원지간임을 말해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이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이러한 상징적 수법을 채택한 것도 일제의 검열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객은 이 변형된 인간상을 똑똑히 인식하고 공명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 <아리랑>에서 잠재되어있던 민족 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되찾을 수 있었고 라스트 신에서 영진이 정신을 회복하여 수갑을 차고 아리랑 고개를 넘을 때 관객들은 나라 없는 설움을 통절히 느끼면서 주인공과 함께 눈물지었던 것이다.
나운규의 강렬한 주제의식은 표현의 자유를 잃고 있는 시기였기에 내면세계로 변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검열제도의 강화로 저항적인 작품은 상영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1922년부터 실시한 검열규칙이 처음에는 외국영화에 치중하여 풍기, 폭력에 중점적으로 검열했으나 한국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됨에, 1925년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 그해 7월 5일 총독부령 59호로 공포 실시했다. 민족의식이 내포되어 있는 작품은 부분적으로 절단되거나 혹은 상영금지 되었다.
(②에서 계속)
(잡지 [공간] 1968년 12월호, 공간사, 1968, 18~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