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76
(①에서 계속)
이 규정은 1927년 9월 19일 다시 개정 강화되었고 1934년 8월에는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변형, 소위 ‘조선 동화의 근본방침인 일선일체(日鮮一體)의 이념을 철저히 보급’하기 위해 민족적인 색채가 조금이라도 내포되어 있는 작품은 상영을 불허했다.
이러한 영화검열은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로 인해 한국영화의 전통이 무엇인지 표면화되지 못한 채, 상징적인 수법으로 한국적인 것은 모두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가혹한 검열제도는 결국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으니 저급영화, 오락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지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아직까지 정부 당국이 직접 검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예술의 질적 저하를 면치 못하게 하는 암적인 행정이 아닐 수 없다. 한국영화 육성을 위해 여러 가지로 뒷받침을 하고 있지만 이 검열만은 자율적으로 하도록 해야만이 정당이다.
1929년까지 나운규의 독무대였으나 호남지방의 한해(旱害)와 관북지방의 홍수로 경제, 사회가 불안해지자 영화계는 잠시 중단상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은 초창기서부터 활약하던 이경손, 윤백남 등이 신인 양성과 이론의 뒷받침에 힘을 썼다. 그러나 이 위기는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이경손 같은 인물도 고국을 등지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영화의 이론적인 확립으로 작품 활동에 크게 영향을 가하였으니 <임자없는 나룻배>를 비롯한 수작을 생산케 했다.
1935년, 영화의 일대 혁명인 토오키 시대를 맞으며 그 첫작품은 <춘향전>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토오키화는 1937년부터였으니 <나그네>와 같은 가작이 나왔다. 이규환의 이 <나그네>는 일본과 합작으로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한강>, <심청>, <성황당> 등의 수작이 계속 발표되어 한국적인 색채를 짙게 풍겨주었다.
이때 발성영화는 오늘날 애프터 레코딩이 아닌 동시녹음임을 밝혀둔다.
동시녹음으로 한국적인 색채를 찾아, 본질적인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그 시기에 일본은 소위 지나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의 중국침략전 이후, 사회, 경제 악화로 자재난으로 영화제작은 위협을 받게 됐다.
드디어 1940년에는 ‘조선영화령’을 제정 실시케 되었다. 영화는 국가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영화제작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영화는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1943년에는 영화사의 강제 통합을 강행하여 통제회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설립, 영화인들은 등록을 했고 등록된 영화인만이 작품 활동을 하게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전창근의 <복지만리>, 최인규의 <국경>, <수업료> 등이 발표됐고 통제회사에서는 일본어로 된 작품을 제작했다. 한국영화의 그 명맥은 완전히 끊어졌다.
1945년 민족의 해방과 함께 표현의 자유를 얻은 영화인은 다시 제 위치를 찾아 다시 모였고 영화 기재를 정비하여 작품활동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던 한국영화는 소생했으니 한국영화의 해방이었다.
<해방뉴스>를 필두로 <자유만세>가 등장했다. 한민족이 일제에 대한 레지스탕트를 정면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자 일제에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던 것을 리얼하게 묘파했다. <안중근사기>, <윤봉길 의사>, <유관순> 등 일제에 대한 저항이 표면화되었다. <조국의 어머니>, <애국자의 아들>, <해방된 내 고향> 등 모두가 일제 하에서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해방 후 3년간은 해방의 감격 속에서 작품활동을 전개했지만 좌우 사상의 분열로 영화계도 그 여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해연>, <성벽을 뚫고>, <전우>와 같은 작품을 생산케 했다.
1950년 드디어 6.25 사변이 발발함으로 모처럼 시설을 복구해왔던 것이 무참히 파괴되고 또한 유능한 영화인을 상실했다. 사변으로 인해 16미리 영화나마 생산이 중단됐고 뉴스영화도 일본에서 만들어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피난지에서의 작품 활동은 아주 미미한 상태였고 서울 수복, 휴전과 함께 다시 한 두편이 생산됐으니 <출격명령>과 같은 전쟁, 기록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955년 국산영화의 면세조치가 취해졌다. 이규환의 <춘향전>이 그 첫 케이스로 흥행적인 대성과를 올렸다.
<춘향전>의 흥행적인 성공은 사극영화 붐을 일으켰고, 우후죽순과 같이 영화사가 설립되고 흥행을 위한 영화 이전의 작품의 대부분이었다.
<자유부인>의 선풍은 다시 시대물에서 현대물로 전환시키는 전기가 되었으니 주먹구구식 제작 방식의 노정이었다.
1년에 불과 10여작품밖에 생산 못하던 영화계가 일약 백여편이 범람했으니 그 무질서, 무계획은 — 표면상으로는 황금시대에 접어든 시기였다.
면세조치는 제작자 아닌 ‘전주(錢主)’의 횡행으로 부작용이 더 했으니 지방 돈을 모아 영화 아닌 활동사진을 만들어냈다. 이 악영향이 오늘날까지 영화계에 뿌리를 박고 악순환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1955~58년에 이르는 면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 같은 화제작이 나왔다. 이 작품은 아세아영화제에 출품, 최초로 ‘최우수희극상’을 수상했고 베를린, 샌프란시스코 등의 영화제에도 참가, 국제진출을 시도한 첫 작품으로 의의가 있었다. <잃어버린 청춘>, <황진이>, <아리랑> 등의 몇 작품 뿐이고 57년은 무려 140여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해는 본격적인 촬영소가 건립되고 영화의 기업화를 기도한 새로운 출발의 해였다.
사단법인 한국영화협회가 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 창립, 정릉에 스튜디오를 두고 김소동의 <돈>이 만들어졌다.
삼성스튜디오가 그해 7월에 완공됐고 또한 안양촬영소가 그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500평 스튜디오, 380평) 준공되어 영화기업화의 닻을 올렸다.
동양 최대의 녹음실, 미첼 촬영기를 비롯한 자동 현상기, 자동 편집기, 농도계량기, 화면조정기, 최신웨스트렉스, 녹음시설 등의 최신 장비를 갖추었으나 아깝게도 제대로 활용을 못한 채 문을 닫고 말았다.
(③에서 계속)
(잡지 《공간》 1968년 12월호, 공간사, 1968, 18~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