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빠에서 ‘자유부인’ 스타가 되기까지>(1956)

영화사가 노만 93

by 유창연

스탠드빠에서 ‘자유부인’ 스타가 되기까지:

일약 주역 ‘스타’로 ‘데뷔’한 신인 김정림의 사생활


유림(柳林)

스탠드바에서 자유부인까지.png 국제영화 1956년 9월호. 필명 '유림'으로 쓴 노만의 배우 김정림 기사 <스탠드바에서 자유부인 스타가 되기까지>


“레디 고―, 카메라” 감독의 명령이 내렸다.

카메라가 도는 소리뿐, 주위에는 조용했다. 카메라 앞에 처음 서는 정림(靜林)은 온몸이 꼿꼿해짐과 동시에 걸음이 통 걸리지가 않았다. 그저 어색하기만 하다. 이렇게도 무서울 것이 무엇인가? 귀에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 뿐.


제1화

여기는 <자유부인>의 ‘로케’ 장소로 된 혜화동의 어느 골목이었다. 자유부인 ‘오선영 여사’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었다. 정림은 연습할 때는 곧잘 몸이 움직였으나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온몸의 자유를 잃고 자신도 어떻게 걷는지를 통히 알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이 <자유부인>의 ‘스타’로 데뷔하는 첫 ‘컷트’였다. 이 첫 장면에서부터 배우란 직업이 얼마나 힘든다는 것을 정림은 알았다. 그러나 일단 결심하고 결정적인 이상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겠다고 다집을 하듯 굳게 마음먹었다. ‘이것이 내가 소녀시절부터 막연하나마 꿈꾸던 것이 아니냐!’

정림은 정신차리고 이를 악물고 싸웠다. 오직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처음 ‘카메라’ 앞에서는 그로서 촬영대에 모여든 군중 앞에서는 제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고 노력해서 별로 많은 ‘엔지’(N·G)는 내지 않았다. 역시 정림은 타고난 소질도 그러했으려니와 그의 파란많던 사회생활이 그로 하여금 연기를 발휘할 수 있는 체험을 쌓아주었던 것이다.


제2화


정림이가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다. 첫 번 정식으로 계약하기까지 이르렀던 작품은 바로 <구원(久遠)의 정화(情火)>였다. 이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서 한 달 동안이나 승마(乘馬) 연습까지 했으나 지금 세 살짜리 여아(女兒)가 태중에 있었기 때문에 단념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준 것은 그의 친구의 남편 김강일 씨의 소개였다. 김강일 씨는 현재 ‘유엔’군 종군기자로서 한형모(韓瀅模) 감독의 친구이기도 하다. 6.25 이후 한(韓) 감독이 또한 ‘카메라’ 기자로서 종사하고 있을 때의 동료로서, 이번에도 <자유부인>의 신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씨가 정림을 소개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안오는 기회는 정림에게 왔다. 정림은 <자유부인>의 자유부인 오선영 역을 맡는다는 데는 처음은 주저했다. 이미 신문에서도 봐왔고 단행본도 읽은 후라 작품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전부터의 권고도 있었고 자신도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은 의욕이 있었다.

“얘 너 영화배우가 됐으면 참 좋을게야”

친구의 말이었다.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왜? 나 같은게 어떻게 배우가 되니?” 배우가 되라는 것은 첫째 미모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니 정림은 속으로 무척 기쁘기는 했으나 이렇게 대꾸했다.

“예쁘기도 하지만 소질도 있잖니?”

사 년 전의 친구와의 대화가 불현듯 정림의 기억에 되살아났다. 참말 나는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배우가 된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다. 지금 자신을 생각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여기에 마음이 있다는 것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다시 그 이튿날 오후 여섯시 김씨와 한(韓) 감독이 찾아왔다.

“좋은 기회입니다. 한 번 나가보시죠” 김씨의 말이었다. 묵묵히 앉아있던 한 감독은 이번 <자유부인>에 신인을 쓰는 이유를 말하고 또 간청했다.

“이 작품의 오선영이는 한복과 양복이 모두 그럴 듯이 맞게 어울려야만 합니다. 이런 점만 해도 김 여사는 적임자이시니 꼭 나오십시오”

이렇게 두 사람 의견에 못 이기는 척하고 그 이튿날 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물론 한 감독을 위시해서 제작자들이 반가이 맞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 사이, 모든 뒷 스태프들은 정림의 선을 보기 위해 바쁘고 그 자신은 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곧 출연 계약을 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계약은 십이만환(圜)에 낙착되었다. 낙착되었다기보다도 제작사 측에서 출연하는 배우와 그 역을 일일이 예를 들어 누구는 얼마 얼마 해서 결국 신인이라는 데 정림이 속고 말았다. 거기에다 옷은 자기 옷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계약 밑에 촬영이 개시되어 완료하기까지의 정림은 여섯 벌의 자기 옷을 버려야만 했다. 뼈저린 몇 달 동안의 고생이 신인이라는 데서 완전히 금전상의 ‘마이너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촬영 도중 십이만환이라는 계약이 자기를 속였다는 것을 알았으나 정림은 잠자코 일에만 충실했다. 더욱 신인으로서 녹음을 그리 실수 없이 감당했고 완전히 한 작품이 되어서 상영하자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고 서울에서만 작품에 들었던 돈을 빼고도 남았다. 한국영화의 최초의 장기 상영 기록을 돌파한 오늘에야 제작사에서 정림에게 좀 더 생각해주겠다는 언약을 했다. 그가 비록 제작자에게는 속았으나 자신에게는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제3화

정림은 지금부터 33년전 4월 19일 평양 기림리에서, 술 도매상의 딸로 태어났다. 기림소락교를 거쳐 서문고녀를 나온 정림은 어려서부터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집을 얻어 살았다. 때문에 정림은 가정 환경이 복잡해서 공부에는 그리 머리를 두지 않았다. 한편 너무 조숙해서 이미 소학교 유학년때 이웃에 사는 숭의상업학교 3년생 학생과 사랑을 속삭였다. 이 풋내기 첫사랑은 아직도 정림을 버리지는 않고 있다.

여학교 시절에는 공부도다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세계문학전집은 대개 다 읽었다. 이렇게 독서를 많이한 탓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조숙했었다. 더욱 학예회 같은 때는 꼭 뽑혀서 나갔고 노래를 잘 불렀다. 이것이 모두 정림으로 하여금 오늘날 ‘스타’가 되게 한 하나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공부도 안하고 극장에만 자주 드나들었다. 말하자면 학교에서 불량 소녀로서 취급을 받게 되었고, 또 자신도 공부할 흥미가 없어서 집에서 놀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8.15 해방이 왔고 다시 38선이 생기자, 음울한 가정을 버리고 서울에 있는 언니를 차장 1947년도에 단독 월남하였다. 언니를 찾아 왔으나 언니도 역시 풍족지 못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언니가 경영하는 다방 ‘플라워’에서 언니를 도와 일을 했다. 허나 다방의 수입이 시원치 않아 다시 밤에는 ‘스탠드 바’에서 일을 보게 됐다. 이런 고달픈 생활이 흐르고 뼈저린 설움을 겪어 오면서 꾸준히 살기위해 일을 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해 정림을 자주 찾아드는 신사가 있었다. 어느덧 서로 애정을 느끼고 정림은 이 사람과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더욱 결혼식을 올릴만 한 여유도 없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정림은 이 사람에 아내가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였다. 이미 딸이 생겼고, 정림은 이 사람과 생활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실업가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따로 살림을 차리고 자그나마 사랑을 보금자리를 이루었다. 그러던 중 6.25 사변으로 해서 부산에 피난을 하고 또 다시 다방 마담으로 직업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고 생활은 점점 고달퍼만 갔다. 지금도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일본에서 적으나마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 허나 그 돈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어 그나마 몇칸 안되는 집을 세놓고 있는 형편이다. 이 집에서 정림은 7세와 3세 되는 두 딸과 더불어 고적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제게는 <자유부인>의 오선영 같은 역보다도, 비극의 주인공이 맞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역을 해봤으면 해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정림은 파란 많은 자기의 반생이 가슴 깊이 간직되어있는 상 싶다. 말하자면 <황혼>의 주인공 같은 반생이었고 정림 자신도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제4화

<자유부인> 출연 이후, 정림은 언니가 경영하는 이름없는 요리집에 마담 노릇을 하고 있다. 12만환의 출연료로는 그의 의상값도 못되었고, 역시 생활을 위해서 지금도 직업을 못버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림이가 걸어온 반생은 자유부인의 무질서한 생활, 그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 요리집은 밝힐 수는 없으나 신신백화점 뒤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언니가 경영하는 것으로 방이 넷이 있을 뿐, 단골 손님만을 상대하는 고급 요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정림은 생활을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팔아야만 한다. 얼굴에는 비록 웃음을 띠었으나 그 마음 속에는 어디나 호소할 곳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슬픈 운명 속에서도 정림은 꾸준히 노력을 했고, 곧 우리들은 ‘스크린’에서 그네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75


(국제영화 1956년 9월호, 62~64쪽)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만 저작 총목록